[배정한의 토포필리아] 오래 머무르는 공원, 도시의 라운지

한겨레 2023. 9. 2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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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의 토포필리아]

새 오목공원, 지붕이 넓고 의자가 많은 도시의 공공 라운지다. 사진 배정한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공원에 지붕이 있다. 넓은 지붕 그늘에서 편안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 반나절을 보냈다. 개장 첫날 공원에 가본 건 처음이다. 서울 양천구 목동 중심부의 오래된 동네 공원이 옷을 갈아입었다. 삼십 년 넘는 시간을 겪으며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를 통과하면 산뜻하고 날렵한 디자인의 백색 구조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방 150m 정사각형 공원 부지 중앙에 놓인 가로세로 53m 정사각형 회랑이다. 오목하게 살짝 낮춘 잔디마당을 둘러싼 회랑은 널찍한 길이자 넉넉한 지붕이다.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다. 그늘을 누릴 수 있다. 회랑 상부는 공원의 풍성한 숲과 도시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공중 산책로다.

1989년에 만든 ‘오목공원’은 백화점과 방송국 건물, 여러 상업·업무시설에 둘러싸여 있고 지하철역도 가깝다. 다양한 연령대의 동네 주민, 주변의 직장인과 학생들로 북적이는 멀티플레이어 공원으로 쓰여 왔다. 하지만 조성 당시와 크게 달라진 공원 이용 패턴과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내기엔 부족한 면이 적지 않았다. 양천구는 목동의 다섯 개 근린공원을 고쳐 쓰는 계획을 세웠는데, 파리공원에 이어 오목공원 1단계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

라운지. 새 오목공원 디자인 설명서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단어다. ‘공공 라운지’라는 공간 프로그램을 공원에 삽입하는 게 설계의 핵심이다. 설계자인 조경가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과 공원을 산책하며 라운지의 의미를 물었다. “로비가 서성이는 공간이라면, 라운지는 앉아서 떠드는 장소다. 공원은 일하러 오는 데가 아니다. 운동만 하는 곳도 아니다. 공원은 편하게 앉아 오래 머무르며 품위 있게 쉴 수 있는, 도시의 라운지(여야 한)다.”

오래된 공원에 회랑을 삽입했다. 회랑 하부는 안온한 쉼터고 상부는 공중 산책로다. 양천구청 제공

옛 공원의 바탕과 틀을 살리면서 두 가지 라운지를 삽입했다. 하나는 ‘회랑 라운지’다. 장식을 철저히 배제해 오히려 공간감이 돋보이는 회랑 하부에 의자와 테이블을 넉넉하게 흩어놓았다. 육중하고 둔탁한 전형적인 벤치가 아니다. 사용자가 쉽게 옮겨 마음대로 배치를 바꿀 수 있는 의자다. 공원용 평벤치가 아니고 등을 기대고 팔을 걸 수 있는 의자라 일어나기가 싫다. 웬만한 1인용 소파보다 편하다. 회랑 아래 공간에는 작지만 알찬 전시실, 책방, 꽃집도 있다. 회랑 위로 올라가면 공원 2층이 넓게 펼쳐진다. 경쾌한 철제 의자와 테이블이 공원 산책자의 걸음을 붙잡는다. 멍하게 넋 놓고 구름을 관찰하거나 노을을 감각하기에 그만이다.

다른 라운지는 숲속에 있다. 건물 4층 높이까지 자란 나무 대부분을 그대로 두고 소교목과 관목, 초화류로 하층 식생을 보강해 숲의 양감이 훨씬 커졌는데, 그 사이사이에 ‘숲속 라운지’를 삽입한 것. 오래된 바탕 위에 간결한 디자인을 추가해 공간의 뼈대를 다시 빚어냈다. 목재 데크 위에 놓은 이동식 의자와 테이블이 ‘힙’한 카페들 가구 못지않다. 옛 숲과 새 공간이 포개져 시간감이 두텁다. 나만의 비밀 아지트인양 발을 뻗고 초능력 히어로물 ‘무빙’을 보다가 평화롭게 졸았다.

가을이 도착한 공원에서 보낸 오후와 저녁, 개장 첫날이지만 빈 의자를 찾기 어렵다. 풀밭의 폭신한 감촉을 마음껏 즐기는 아이들, 처음 만났음에도 수다의 물꼬를 튼 엄마들, 손녀의 자전거를 밀어주는 젊은 할아버지, 반려견과 함께 석양을 마주한 패셔니스타 할머니, 상기된 표정으로 2인용 의자에 앉은 고등학생 커플, 상가 분양 전단을 펼쳐놓고 토론을 벌이는 동네 친구들. 참 다양한 이들이 도시의 작은 라운지에 머물렀다. 밤이 되자 학원 마친 학생들이 회랑 안쪽 마당을 대각선으로 달리며 잠깐의 해방감을 맛본다. 어느 연인의 대화를 엿들으니, 회랑 2층 산책길 덕분에 공간이 두꺼워졌다는 꽤 전문적인 공원 디자인 품평을 나눈다.

모두의 라운지, 새 오목공원의 매력에 꼭 맞는 공간론으로 ‘제3의 장소’가 있다.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집과 일터만 오가는 틀에 박힌 도시 생활에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정(제1의 장소)과 직장(제2의 장소)에 묶인 갑갑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과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나 교류하며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곳, 이를테면 단골 술집과 카페, 독립서점, 공원 같은 곳이 제3의 장소일 테다. 올든버그에 따르면, 제3의 장소에서 “목적 없는 접촉이 만들어내는 비공식적 공공 생활”은 건강한 시민사회의 기반이다. 번역서 ‘제3의 장소’의 원제는 ‘정말 좋은 장소’(The Great Good Place)다.

넓은 지붕 그늘 밑에서 편안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 오래 머무를 수 있다. 사진 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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