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 해봤어?”…정주영의 ‘불도저 신화’ 이곳에서 시작됐다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9. 2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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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건설사를 따라 걷다 (3) [사-연]
예산도, 인력도, 장비도 부족했던 공사
1969년 9월 경부고속도로 왜관공구 건설현장에서 작업자들이 굴착기를 사용해 암반을 부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대통령의 요구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고속도로를 통해 서울-부산 간 이동이 5시간 내로 가능하게 할 것. 둘째, 무조건 3년 내에 완공할 것. 첫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 지시만큼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고속도로 공사는 기세를 몰아 진군하는 병사들처럼 경로에 꺾임이 없는 공사였습니다. 산이 나타나면 터널을 뚫고, 강과 골짜기를 만나면 교량을 세우는 고속도로 공사는 일반적인 국도나 시내 도로와 공사의 개념 자체가 달랐습니다. 시공 난이도가 월등히 높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막상 공사를 시작해보니, 각종 장비와 기술 인력의 부족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첩첩산중이었습니다.
1968년에서 1970년 사이 촬영된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한국도로공사]
착공 당시 국내의 중장비라고는 1,647대 뿐, 그마저도 대부분이 한국전쟁 직후 도입한 노후 장비였습니다. 덤프트럭은 200여 대 뿐이었고, 크레인은 두 대였습니다. 400여km의 고속도로의 건설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백여 대의 크레인이 필요한데, 달랑 두 대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 부족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공사는 코앞인데 장비는 없는 상황에서, 정부는 미국·프랑스·스웨덴 등 선진국 중장비업체와 협상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들여온 장비들로 겨우 대오를 갖추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1964년 완공된 울산정유공장과 현대건설 시멘트 공장에서 쉬지 않고 생산되는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천군만마와 같은 고속도로의 재원이 되었습니다.
1968년 공병부대 장병들이 중장비를 이용해 경부고속도로 달래내고개 구간 공사를 하고 있다. [국방일보]
장비 부족을 해결하니 이번에는 시공을 진두지휘할 기술자가 부족했습니다. 지금처럼 대학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토목 관련 전공자를 구인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임시방편으로 정부는 육사출신의 젊은 장교를 선발하여 교육시킨 후 현장 감독으로 내보냈습니다. 사명감이 투철한 현역 장교들에게 지휘를 맡겨 혹시나 불거질 수 있는 부패나 근무태만을 사전에 방지한 것이었습니다. 감독 선발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돌아갈 가정이 없는 ‘미혼자’인 장교였다고 하니, 그 현장이 얼마나 혹독하고 지난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미대 출신의 ROTC 장교들이 총동원되어 전 국토의 지도와 모형의 제작에 매달렸고, 여기서 제작된 등고선 지도와 채색 지도 등은 현장에서 요긴하게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공병대원들은 장교와 일반병의 구분 없이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군 공병대가 건설부나 민간 건설사들보다 도로공사의 경험이나 기술이 풍부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시설과 장비를 국군 공병대가 소유하고 있어 장비의 동원이 수월했고, 적은 돈(군인 월급)으로 많은 노동력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첫 구간의 초고속 개통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12월 열린 경인·경수고속도로 개통식에서 개통 테이프를 끊은 뒤 도로에 샴페인을 뿌리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1968년 12월 21일은 우리나라 고속도로 역사상 두 번의 경사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이날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준공되었습니다. 서울 영등포에서 인천 가좌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던 거리가 고속도로 개통으로 20분으로 단축되었습니다. 이날은 동시에 경부고속도로의 첫 구간이었던 서울-수원 제1시범구간의 개통일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2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니, 10개월 만에 42km의 고속도로가 완공된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행정절차나 타당성 검토 등을 거쳐 5년 이상 소요될 일을 다섯 배 이상 빠르게 앞당겨 끝낸 셈이었습니다. 경인·경수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여한 박정희 대통령은 도로 위에 샴페인을 뿌리며 우리 기술로 준공한 고속도로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험난했던 옥천 당재터널 공사
1969년 6월 경부고속도로 대전공구 길치터널(현 대전터널) 공사현장과 완공된 터널의 모습. 현재 이곳은 고속도로에서 지정 해제된 후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가야 할 길은 멀었습니다. 터널이나 교량 구간 없이 대부분이 평지였던 서울-수원 구간은 아주 평탄한 공사 구간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경부고속도로 공사 중 최대의 난코스는 어디였을까요. 바로 충북 청원에서 옥천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약 70km 구간이었습니다. 고속도로 다른 구간이 1km에 평균 1억 원의 예산이 들어갔다면, 대전공구는 1억 2천만 원, 대전-묘금리 구간은 1억 7천만 원의 공사비가 들어 다른 곳에 비해 1.5배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1969년 경부고속도로 대전공구 당재터널 굴착 모습. [한국도로공사]
그중에서도 옥천의 당재터널(현재 옥천터널)을 뚫는 공사는 길이 구불구불하고 지형이 험준해 공사에 사용할 중장비들을 넣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임시방편을 고안한 것이 소달구지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장비가 다니지 못하는 좁고 험한 길을 소의 힘을 빌려 측량장비를 운송했습니다. 겨우 장비를 투입했지만 공사는 진척이 없었습니다. 발파작업만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열세차례의 낙반사고가 있었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공사 과정에서 신령이 깃든 느티나무를 베어서 신이 노했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하지만 단지 터널 구간이 암반이 아닌 토사가 퇴적된 지층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완공 예정일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고, 속히 터널 공사를 완료하지 못하면 ‘당재터널 때문에 고속도로 준공이 미뤄졌다’는 오명을 쓸 판이었습니다. 해결책으로 현대건설은 단양 시멘트공장에서 보통 시멘트보다 20배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생산했고, 이를 활용해 시공하는 작업팀을 늘렸습니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 개통 열흘여전에 겨우 터널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옥천터널(옛 당재터널)이 경부고속도로로 사용되던 당시 모습. 2003년 경부고속도로 일부 구간이 선형화되며 이 터널은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었고, 현재 상행선 터널은 세계 최대 규모 식물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넥스트온]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1970년 7월 대구에서 열린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시민들이 고속도로의 준공을 기뻐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한국도로공사]
1970년 7월 7일, 대구에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공사 기간은 총 2년 5개월로, 당시 세계 고속도로 역사상 최단 기간을 기록했습니다. 165만대의 중장비와 철근 5만여 톤, 시멘트 680만 포대, 아스팔트 47만 3천 드럼이 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되었습니다. 공사의 동원된 인력은 892만 8천명이었고, 험난한 공사 과정에서 77명이 사망했습니다. 총 소요 경비는 429억 원으로 당초 예상보다 100억 원의 예산이 더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1960년대 한 해 정부 예산의 약 10%를 상회하는 금액으로, 당시 온 나라가 고속도로 건설에 사활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앞서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추모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이 위령탑은 현재 금강휴게소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그해 12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을 기념해 건설부에서 세운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 나들목 모양을 형상화한 높이 30.3m의 기념탑은 경부고속도로 중간 지점인 추풍령휴게소에 세워졌다. [국가기록원·정부기록사진집]
왜 그렇게 ‘빠른 건설’에 사활을 걸었던 걸까요. 가장 큰 이유는 시급한 가난 탈출에 있었을 것입니다. 도로망을 구축해 경제성장의 기틀을 만드는 동시에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한 토목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연관 산업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1960년대만 해도 북한과의 경제성장 및 규모가 비등비등했기 때문에, 국토를 관통하는 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우리가 월등함을 알리고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 본인의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1971년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 이전에 고속도로를 완공하여 공적을 쌓고자 했던 것입니다.
2년 5개월의 공사를 마치고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국사편찬위원회]
온 국민의 생활을 바꿔놓은 새로운 길
1974년 10월 상공에서 바라본 경부고속도로의 모습. [정부기록사진집]
경부고속도로는 온 국민의 생활을 바꿔놓았습니다. 고속도로를 통해 생산지인 공업단지와 소비처인 대도심, 수출항 사이의 이동이 원활해지며 생산과 수출이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고 이는 곧 경제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등장 이후 화물 및 여객의 수송률은 철도·일반도로가 지속적으로 감소한 반면, 고속도로는 연간 5-10%씩 늘었습니다. 개통 첫 해 1만 대였던 경부고속도로의 하루 통행량은 2019년 77만대로 증가합니다. (요즘은 KTX 등 교통수단의 다양화 및 각종 고속도로의 신설로 경부고속도로의 통행량은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 국토의 균형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서울과 부산, 그 사이의 대도시와 지방 도시들이 상호 연계되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전 국토가 일일 생활권으로 바뀌며 지방 곳곳의 관광단지가 개발되었고, 누릴 수 있는 여가문화가 새롭게 적립되며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우리 손으로 건설한 반듯한 도로는 식민지배와 전쟁, 지독한 가난의 시대를 거치며 패배의식과 상실감에 젖어 있던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것이 경부고속도로가 ‘국토의 대동맥’으로 일컬어지며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초고속 성장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신갈분기점 일대 상공에서 바라본 곧게 뻗은 경부고속도로. [매경DB]
경부고속도로는 2023년 현재에도 대한민국의 국유재산 1위로 약 그 가치는 12조 1,830억원에 달합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고 단일 노선으로 총 연장이 가장 긴 고속도로이기도 합니다. 경부고속도로는 2004년 아시아 대륙 32개국을 연결하는 국제 자동차도로망, 아시아하이웨이의 1호선 구간으로 포함되었습니다. 훗날 통일이 된다면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과 평양, 중국, 동남아, 인도, 터키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참고자료>

ㅇ「50년의 자부심 세계로 미래로」, 한국도로공사 50년사 자료집

ㅇ 국토교통부, 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채널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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