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헛돈 쓰는 거 아냐?”…흔들리는 우방 마주한 젤렌스키 [특파원 리포트]
■ 연설도 거절, 사진 촬영도 거부…젤렌스키 방문에 심드렁한 미 하원
지난해 12월, 러시아의 침공 300일 만에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미국 의회는 그야말로 아낌없는 환대를 보여줬습니다. 미국 상하원은 대대적인 합동 연설을 마련했고, 당을 막론하고 모든 의원이 기립해 박수로 맞이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신들의 돈은 자선이 아니라 국제 안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자”라며 지원의 당위성을 당당히 강조했습니다.
9개월 만인 21일(현지 시간) 다시 미국 워싱턴 D.C.를 찾은 젤렌스키 대통령.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원에 쓰일 돈줄을 쥐고 있는 하원이 첫 방문지였는데, 매카시 하원의장은 직접 카메라 앞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맞이하는 걸 거부했습니다. 매카시 의장은 하원이 야당인 공화당으로 넘어가면서 임명된 공화당 소속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의회 연설 요청도 거부한 매카시 의장은 비공개 회담 장소에서 찍은 기념사진에서도 내내 굳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이틀 전에도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입장을 묻는 말에 "젤렌스키가 미국 대통령이냐?"고 반문했던 매카시 의장입니다. 회담이 끝나고 나서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지원액과 관련된 책임에 대해 우리는 매우 우려한다. 현재 전황이 어떤지, 다른 계획은 뭔지를 물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지원 정당성에 공감하는 대신 지원의 효율성과 승리 가능성을 따져 물었다는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의회에 요청한 240억 달러의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안은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 공화당 강경파 "우크라이나엔 안보 이익이 없고, 우린 돈이 없다"
미국 하원, 특히 공화당의 이런 움직임은 우크라이나 지원을 반대하는 당내 강경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미국 내 분석입니다. 공화당 소속 켄터키주 상원의원 랜드 폴은 "우크라이나에는 국가 안보 이익이 없으며, 만일 있다고 해도 우선돼야 할 건 우리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장 공화당 내 지지율이 50%가 넘는 유력 대선 주자인 트럼프 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합니다. 공화당 내 강경파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영향을 받았다는 관측이 많습니다.
'외국 사안에 개입하기보단 우리나 잘살자'는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에 동감하는 많은 공화당 지지자들 역시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합니다. 지난달 CNN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55%가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자금 지원을 승인해선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공화당 지지자 내에선 이 비율이 71%에 달합니다. 공화당 내 지원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기까지 하자, 지난달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의 보고서에선 "향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자금 지원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왔습니다.
이미 우크라이나에 대한 절대적 지지에 조금씩 금이 가는 모습이 나타난지 벌써 몇 달째입니다. 지난 7월, 젤렌스키 대통령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확답받지 못해 불만을 터뜨리자 영국 국방장관은 "우린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이 아니다, 사람들은 우크라이나가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며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이달 초 인도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동선언에선 지난해와 달리 '(러시아의) 침공, 우크라이나를 향한 전쟁'이라는 문구가 빠졌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였던 폴란드는 최근 자국 농산물 보호를 위해 취한 우크라이나 농산물 금수 조치를 두고 우크라이나가 WTO(세계무역기구) 제소 의사를 밝히자 무기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했다가 번복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거나 줄일 조짐을 보인다면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유럽은 미국이 지원을 끊으면 그 짐이 유럽으로 떠넘겨질까 불안해합니다. 미국의 동맹이나 우방이란 이유로 애써 러시아와 척지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한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도 명분을 잃게 됩니다.
■ 대반격 석 달째 성과 못 내…" 밑 빠진 독 물 붓기 안 돼, 성공 전략 내놔라"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처럼 긴 전쟁에는 피로감이 뒤따릅니다. 지지부진한 전황도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6월부터 시작된 대반격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영국 매체 '이코노미스트'는 "우크라이나는 대반격 이후 현재까지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의 0.25%도 해방 시키지 못했고, 1,000km에 달하는 전선도 거의 이동하지 않았다"며, "우크라이나군이 몇 주 안에 돌파구를 마련하길 기대하는 건 실수일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서방 지도자들은 물론 우크라이나 스스로도 전쟁이 소모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그렇다고 전쟁이 곧 끝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난주 KBS와 인터뷰한 보리스 본다레프 전 러시아 외교관은 "내외적 이유로 볼 때 푸틴이 평화협정이나 협상에 나설 확률은 0%"라고 단언했습니다. 경제도 살아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각국은 '헛돈을 쓰는 실책'이나 '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며, '이긴다는 보장이나 전략이 있는지'를 우크라이나에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우크라이나가 장기전에 대비할 지속력을 마련하면서 원조보다는 투자에 의존하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 절박한 젤렌스키…바이든도 피로감 불식 안간힘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국 방문엔 그래서 지난해와는 달리 절박함이 엿보였습니다. 상하원 의원들을 만나서는 지원예산을 통과시켜줄 것을 호소하며 "지원받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백악관과 국방부를 찾아선 감사 인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백악관도 화답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장기적 안보를 미국과 주요 7개국이 보장해줄 것을 약속했고, 3억 2천만 달러, 우리 돈 4천3백억 원에 달하는 추가 지원 패키지도 선사했습니다. 이번 지원 목록에서는 빠졌지만, 우크라이나가 계속 요구해온 사거리 300km의 에이태큼스(ATACMS) 지원 역시 막바지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는 워싱턴포스트 보도도 나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국민들은 동맹 및 우방과 함께 세계가 우크라이나 곁에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그게 지금 우리의 압도적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내년 대선을 앞둔 바이든 대통령 역시 이제껏 760억 달러, 우리 돈 100조 원 넘게 미국 예산을 투입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거나 우크라이나가 진다면 정치적 타격을 입을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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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기자 (man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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