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리시 장인’ 김지운과 ‘딕션 장인들’의 시너지, 클래스가 다른 ‘거미집’ [SS무비]

함상범 2023. 9. 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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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집’ 스틸컷. 사진 | 바른손이앤에이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영화감독 김열(송강호 분)은 눈만 감으면 표독스러운 이민자(임수정 분)가 떠오른다. ‘거미집’이란 영화를 찍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흔하디 흔한 치정극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아서다. 괴로움에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김열이 만든 영화는 전형적인 통속극이다. 영화 속 이민자는 돈 많은 집안에 시집 갔지만 남편 강호세(오정세 분)는 허구헌 날 오입질이고 시어머니는 애꿎은 며느리를 무시하곤 한다. 이민자는 시어머니에게 온갖 치욕을 당하다 떠나는 여리고 소극적인 여성으로 묘사됐다.

김열은 이민자를 복수의 화신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바꿀 수만 있다면 ‘걸작’이 탄생할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괴로움을 느끼자 김열은 제작사와 배우들 설득하기로 작정한다.

김지운 감독의 신작 ‘거미집’은 1970년대 영화 촬영장이 배경다. 결말을 바꾸게 해달라고 제작사를 설득한 결과 이틀의 시간을 번 김열이 바꾸고 싶은 장면을 다시 찍는 과정이 담긴 영화다.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은 컬러로, 영화 속 영화는 흑백으로 그려진다. 말투도 영화 속 영화는 70년대 과장된 톤이다.

다소 생소한 구조와 구성은 이 영화의 독창성을 담보한다. 배우를 연기하는 오정세와 임수정, 한유림 역의 정수정, 시어머니 역의 박정수는 평소 말투와 극화된 말투를 오간다.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편집을 워낙 세련되게 해 이해하는 데 힘들지는 않다.

‘거미집’ 스틸컷. 사진 | 바른손이앤에이


스타일리시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김지운 감독은 색감이 진한 미장센을 다시 한 번 연출했다. 마치 그 시대를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철저한 고증의 배경과 이미지를 촌스럽지 않게 그려냈다. 시대상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들면서 간단한 신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다. 덕분에 전개가 빠르다.

‘거미집’은 영화 촬영장이라는 특수한 현장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로 ‘욕망’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의 다양성을 다룬다. 모든 인물은 각기 다른 성질의 욕망을 갖고 있다.

김열은 예술적인 영화를 통한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고, 강호세는 여색을 탐하며, 한유림 역시 꼬장꼬장한 행동으로 타인의 위에 군림하길 원한다. 유일하게 김열을 지지하는 미도(전여빈 분)는 예술 영화 제작에 대한 욕망을 내비치고, 제작사 대표 백 회장(장영남 분)은 권력으로부터 생존을 열망한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서 후반부 이미지로 영화의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한다. 촬영하는 내내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는 김 감독은 결국 마지막 장면을 찾아냈다. 그 마지막 한 컷으로 영화의 주제를 각인시킨다. 무엇이 영화적 화법인지 정확히 짚어내며 거장의 면모를 선보인다.

매우 독창적이고 어쩌면 생경할 수 있는 이 영화를 쉽게 몰입시키는 방식은 코미디다. 배우들이 액션과 리액션, 대사를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웃음을 만드는 앙상블 코미디가 이 영화의 장르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바쁜 와중에도 정확하게 발음을 전하는 ‘딕션 장인’들로만 섭외했다. 감독이 크게 주문을 하지 않아도 이해력이 높은 배우들이 정확하고 완벽하게 연기를 했다고 한다.

‘거미집’ 스틸컷. 사진 | 바른손이앤에이


워낙 연기 잘하기로 알려진 오정세가 웃음의 선봉장을 맡고, 오랫동안 시트콤에서 단련된 박정수는 무게감을 준다. 베테랑 여배우가 된 임수정은 안정감으로 탄탄한 토대를 만들며, 가장 어려운 롤을 맡은 전여빈이 유쾌함을, 백회장 역의 장영남이 긴장감을 얹는다. 점점 실력이 늘고 있는 정수정은 이 영화의 꽃으로 자리했다.

재능을 바탕으로 연기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배우들이 모였을 때 어떤 앙상블이 발생하는지 ‘거미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김열이 무게감 있는 연기로 중심을 잡는 가운데, 다른 배우들이 저마다의 색감으로 흰 스케치북 위에 붓칠을 남겼다. 시종일관 웃고 떠드는 사이 한편의 그림이 완성됐다.

일각에서는 그들만의 리그나 다름없는 ‘거미집’ 이야기가 대중을 설득할 수 있냐고 묻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공식을 위반한 ‘조용한 가족’으로 흥행을 거머쥔 김지운 감독이라 믿어도 좋다. 스타일리시를 주무기로 스포츠 드라마, 웨스턴, 느와르, 하드보일드 액션,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를 변주한 김지운 감독의 장점이 ‘거미집’에 응집됐다.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분명 커다란 즐거움을 느낄 것으로 예상된다.

‘거미집’ 스틸컷. 사진 | 바른손이앤에이


팬데믹을 거치면서 ‘영화의 의미’를 되새겼다는 김지운 감독의 고뇌가 다방면으로 느껴진다. 추석과 딱히 어울리지 않을 수는 있지만, 독창적인 시도와 ‘블랙코미디’로서의 재미는 클래스가 다르다. 차원이 다른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했다. 워낙 강렬해 ‘거미집’이 올해 연말부터 내년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시상식을 휩쓸 것이란 확신이 들 수밖에 없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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