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폄하가 일제 강점 ‘합법화’인 까닭

김창수 2023. 9. 23.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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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태평양전쟁 종전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의 당사자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배제당했다. 당시 일본의 독립투쟁 훼손 논리가 지금까지도 역사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세기 일본은 우리를 두 번 점령했다. 한 번은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 강제 점령이다. 다른 한 번은 대한민국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배제한 것이다. 일제에 의한 2차 점령이나 다름없다. 일제가 저지른 식민지 강점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광복 78주년이 된 오늘날까지 친일 논쟁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윤석열 정부가 육사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결정하면서, 역사 논쟁이 불붙었다. 사진은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윤석열 대통령 모습. ⓒ대통령실 제공

선조들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강제 점령에 저항했다. 을미의병에서 시작해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진 투쟁으로 3·1운동 이후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 전투와 대전자령 전투와 함께 무장투쟁 3대 대첩이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마침내 1940년 9월17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조직인 한국광복군이 탄생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면 당연히 임시정부의 군사 조직인 광복군을 계승하는 것이다. 의병운동에서부터 광복군으로 이어져 내려온 투쟁의 역사를 정확하게 계승해야만 일제의 2차 점령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짙은 그늘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을 논의하던 초기에 미국은 한국이 조약서명 국가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조약 서명국으로 참가하는 것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에 대해 승전국으로서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가 집요하게 반대했다. 결국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배제당했다.

한국은 연합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당당한 서명국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뜻밖에도 은근하고 지속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자조 섞인 반성은 요시다 시게루의 논리대로 우리 독립투쟁의 역사조차 성과 없는 것으로 변이되어버렸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 강점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게 해주었다.

일본은 1962년 체결한 한·일 기본조약 제2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식민지 강점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해왔다. 제2조에는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미 무효’라는 것은 원래부터 무효라는 뜻인데, 일본은 이를 교묘하게 해석했다.

이 조항에는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무효(Null and Void)’라는 용어는 국제법에서 사용하는 관용구이다. 처음부터 어떠한 합법적인 효력도 없다는 뜻이다. 즉, 1900년대 초 한·일 사이에 맺어진 조약은 당초부터 무효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어판 조약에 ‘이제는 무효(もはや無)’라고 기술했다. 본래는 유효했지만 1951년 9월8일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에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 결과 지금은 무효가 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강점은 합법이고, 독립군의 투쟁은 불법이 된다.

8월29일 광복회 관계자들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앞에서 '독립전쟁 역사 부정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홍범도, 이회영,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 독립투사 5인은 광복을 위한 투쟁의 역사 속에 존재한다. 그들은 헌법에서 말한 대로 대한민국의 뿌리이다. 홍범도는 의병운동부터 시작하여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에다 청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의 주역으로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된다. 김좌진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며,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부터 한국광복군 참모장, 초대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들의 독립투쟁을 훼손하는 순간 식민지 강점은 합법이라는 일본의 논리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이 구조가 바로 일본이 우리를 2차 점령한 결과이다.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 국가로 참가했다면 일본의 2차 점령도 없었고, 독립군에 대한 폄하도 애당초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방해 공작 담은 극비 외교문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준비할 때 미국의 최초 판단은 한국이 서명국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1949년 11월 존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국무부 문의에 답변한 것이 미국의 최초 의견이었다. 무초 대사는 '한국 군대가 중국군과 함께 대일 전투에 참여, 수년간 만주에서 한국 게릴라들이 반일 투쟁을 지속, 상하이 임시정부가 현지 한국 군대에 의해 최고지도부로 승인 등'을 근거로 한국의 서명국 자격을 인정했다.

이후 미국 국무부는 대한민국은 수십 년간 계속된 저항운동, 일본에 대항한 전쟁 등에서 활발히 전투한 기록이 있으며, 조약에 필요한 이해관계를 가진 해방된 지역이므로 참석할 자격이 있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정병준, 〈독도 1947〉, 돌베개). 샌프란시스코 협정 담당자인 덜레스 국무부 고문은 일본, 영국과 협상할 때 이런 자세를 유지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대일 투쟁을 근거로 해서 한국의 조약 참가를 주장했다.

1951년 9월8일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미 국무부

당시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는 한국의 참가를 방해했다. 2001년 12월 요시다 시게루의 방해 공작을 담은 극비 외교문서를 일본 아사히TV가 보도하면서 내막이 상세히 알려졌다.

아사히TV가 공개한 극비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23일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 겸 외무장관이 덜레스 미국 국무부 특별고문과 비밀회담을 했다. 덜레스는 한국의 참가 자격을 밝혔으나, 요시다 총리는 한국은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만일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재일 한국인들은 연합국 시민들과 동등하게 재산과 보상금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요시다 총리는 “100만명에 달하는 재일 한국인들이 과잉한 보상 청구를 하고 일본이 받아들이게 된다면 혼란을 피할 수 없다”라면서, “재일 한국·조선인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다”라고 주장했다.

1949년 12월 작성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에서 한국을 참가국 명단에 포함했던 미국은, 요시다와 덜레스의 회담 이후인 1951년 5월 한국 참가 반대로 방침을 바꾼다. 반공 전초기지로서 일본의 역할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협정 체결이 불과 넉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의 독립투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식민지 강점이 합법이라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체결할 때 논리로 이어졌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한국을 배제한 일본의 공작이 2차 점령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국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배제한 논리는 궁색하다. 일본은 한국이 식민지였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교전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자신의 논리를 바꾸기 위해 1차 세계대전 때 폴란드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아 베르사유 조약에 참가한 것과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합작전을 펼치면서도 승인하지 않은 미국과 영국의 책임을 우선 물어야 한다. 임시정부 광복군은 영국군과 협력하여 인도·미얀마 전선에 참전했다. 또한 미국의 전략사무국(OSS:CIA 전신)과 연합해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했다. 서울진공작전의 작전명은 ‘독수리 작전’이고, 이 작전의 책임자는 사전트 중령이었다.

사전트 중령은 독수리 작전에 참여한 광복군 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첫 번째 한·미 동맹(First Korean and American Alliance)’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서 볼 때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논리는 미국이 입장을 바꾸기 위한 궁색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독수리 작전에 참여한 광복군 대원들 사진에 ‘첫 번째 한·미 동맹(First Korean and American Alliance)’이라고 쓰여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1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국제기구인 국제연맹은 1935년 발표한 ‘조약법에 관한 보고서’에서 한·일합방조약을 효력을 발생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했다. 국제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강점을 이미 불법으로 인정했다. 이는 당연히 임시정부를 승인한 효과를 가진다. 국제연맹의 이 보고서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1963년 국제연합(UN)이 이 보고서를 결의안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도리어 한·일합방조약이 식민지 강점 시기에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에도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불법인 셈이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독립군은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한다. 이듬해인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일본 선전포고를 했다. 1949년 11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준비하던 미국 국무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했거나 교전 상태에 있었던 모든 국가는 대일 평화조약의 당사자라는 기준을 마련했다.

이런 기준과 달리 태평양전쟁과 무관한 수많은 나라들도 서명 국가로 참가한다. 도미니카공화국, 코스타리카,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이란, 이라크, 과테말라,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아이티, 남아프리카공화국, 체코, 폴란드 등이다. 파키스탄이나 스리랑카는 영국 식민지였는데도 영국의 지지로 조약 서명국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범국 일본에 관대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기반해 전후 재건에 성공했다. 그리고 사망한 아베 전 일본 총리는 일본 재무장을 위해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활을 꿈꾸었고, 그것은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구체화되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고, 바이든 대통령도 바통을 받아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다.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점점 노골화하고 있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지금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이룬 성취에 대한 자긍심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래 전략, 즉 ‘한반도 전략’ 수립이다.

이승만도 홍범도도 대한민국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는 3·1운동으로 모인 역량을 바탕으로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투쟁을 했다. 광복 후 산업화를 이루었고 민주화·정보화·세계화를 달성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자긍심과 성과를 전략화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근현대사에 자긍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통곡은 겸허한 성찰일 뿐, 우리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승전의 대열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권리를 일본의 공작에 의해 빼앗긴 것이지, 승전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100년이 넘게 이어져온 대한민국은 100년의 ‘틀’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근현대사를 다 녹여낼 수 있다. ‘공’과 ‘과’를 국민 각자가 달리 평가할 수 있을지라도 대한민국이라는 ‘틀’ 속에서는 김구도 대한민국이고 이승만도 대한민국이다. 박정희도 대한민국이고 김대중도 대한민국이다. 노태우도 대한민국이고 김영삼도 대한민국이라는 자긍심을 가지면 홍범도도 당연히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힘으로 다시 ‘한반도 전략’을 꿈꾸어야 한다.

김창수 (전 코리아연구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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