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이랑 결혼해”…근친혼 고집하다 풍비박산 난 집안이 있다?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9. 23.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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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40] “이집트인들은 더러운 야만족이다. 그들은 왕족부터 근친상간을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맞수인 히타이트가 문서를 통해 남긴 글입니다. 대개 라이벌 국가끼리는 서로를 근거없이 헐뜯기에 기록을 곧이 믿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왕족간 근친상간이 횡행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속 야곱은 자신의 외사촌 라헬과 결혼한다. 그림은 요제프 폰 퓌리히의 1836년 작품.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투탕카멘이 대표적입니다. 200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고고학 연구팀은 고대 이집트 신왕국(기원전 1550년~기원전 1352년) 파라오들의 DNA를 연구했습니다. ‘파라오의 저주’ 투탕카멘의 부모를 밝혀냈지요. 그의 아버지는 아테네켄, 어머니는 ‘더 영 레이디‘로 알려진 여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남매였습니다. 투탕카멘은 근친혼의 결과였던 것이지요.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안케세나문. 둘은 이복 남매 지간이다.
투탕카멘의 역사는 비극으로 점철됩니다. 그가 낳은 두 딸은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투탕카멘 역시 자신의 이복누나와 결혼했지요. 누대를 걸쳐 이어진 근친혼으로 그의 후대는 결국 끊기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19세의 나이로 사망하지요. 제18왕조 종말의 시작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의 근친혼은 그럼에도 계속됩니다. 고대 이집트 후기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이복 남동생인 프톨레미 14세와 결혼했었지요. 그야말로 근친의 왕국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귀도 카냐치의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그녀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이복형제와 결혼하고, 로마의 군주들과 염문설을 뿌렸다. 1659년 작품.
“순수한 왕족의 피를 보호하라”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하라.”

역사는 반복됩니다. 한 번은 이집트에서, 또 한번은 유럽에서였습니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근친혼 가문은 오스트리아·프랑스 부르고뉴·스페인을 통치한 합스부르크였습니다. 다른 군주들이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힐 때, 합스부르크는 결혼을 통해 땅을 늘렸습니다.

오스트리아 미남왕 필리프 1세와 스페인 공주 후아나의 결혼.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의 영토까지 지배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한 합스부르크였습니다. 15세기 왕자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 마리와 혼인으로 프랑스 알짜배기 땅을 손에 넣습니다. 그들의 아들인 미남왕 필립은 스페인 왕가의 딸 후아나와 결혼해 영토를 유럽 서부 이베리아 반도까지 넓혔습니다. 결혼으로 제국을 일궜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결혼이라는 성공 방정식을 알아버렸으나, 결국 짙은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영토가 커질수록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이 횡행하게 되면서입니다. 사촌끼리 결혼을 하고, 거기에 또 후손인 사촌들이 계속 결혼을 하다보니 근친계수는 높아져만 갔습니다.

“잘생긴 내 남편 돌리도.” 정략결혼이었지만, 후아나는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했다. 필리프 1세가 죽은 뒤 그녀는 미쳐서 오랜 시간 그의 관을 끌고 스페인 전국을 돌기도 했다. 그녀가 광녀 후아나로 불린 이유였다.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이 오르티스의 1877년 작품.
일례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펠리페 2세는 안 오스트리아와 결혼합니다. 안은 자신의 여동생의 딸이었습니다. 조카와 결혼을 했던 셈입니다. 그렇게 낳은 아들 펠리페 3세는 마르게리타와 결혼합니다. 이 역시 사촌 간 결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펠리페 4세는 여동생의 딸인 자신의 조카와 또 결혼합니다. 동물의 왕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누대에 걸쳐 일어난 셈입니다.
근친의 끔찍한 결과물이 얼굴에 남다
대가 지속될 수록 그 흉칙한 결과물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었지요. 그 이름도 유명한 합스부르크의 ‘턱’입니다.
카를로스 2세의 초상화. 돌출된 턱은 유전병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후안 카레뇨 데 미란다 1680년 작품.
위 사진은 카를로스 2세의 초상화입니다. 왕의 권위를 살리는 초상화에서조차 그 턱을 숨길 수가 없었지요. 카를로스 2세의 경우에는 주걱턱이 너무 심해서 음식을 삼키지도 못했을 수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것뿐일까요. 임신조차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지요. 대를 잇지 못한다는건 개인에게도 충격이지만, 왕조엔 재앙이었습니다.
스페인 전성기를 이끈 펠리페 2세 초상화. 카를로스 2세의 증조부인 그 역시 유전적인 요인으로 주걱턱이었다. 이를 가리기 위해 수염을 기르기도 했다. 안토니오 모로 (1519-1575) 16세기 작품.
스페인 왕조를 먹으려는 주변 국가들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서 승리한 사람이 그 유명한 루이 14세입니다. 그는 자기 손자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하지요. 지금도 스페인 왕가가 ‘부르봉 왕조’로 통하는 이유입니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왕조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부르봉 왕조는 스페인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셈이지요.
“야 스페인 대가 끊겼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묘사한 그림들.
유럽 왕가들이 근친혼을 계속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귀한 혈통을 보전하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천것의 피가 혹여 왕가의 정통성을 훼손할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근친의 피가 계속해서 섞여갔고, 유전적 질병이 왕조를 덮치기 시작합니다.
“스페인 왕위는 이제 부르봉의 것이라네.” 프랑스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 펠리페 5세로 선포되는 장면을 묘사한 프랑수아 파스칼 시몽 제라르(1770-1837)의 그림.
당시 기독교에서는 사촌끼리의 결혼을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효과는 없었습니다. 종교적 교리를 지키다가, 왕조의 정통성이 훼손되는 일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청에서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었기에 사촌 간의 결혼이라도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지요.
근친혼을 못 버린 프랑스
프랑스 왕조 역시 이웃 나라 근친혼의 비극으로부터 반사이익을 본 나라처럼 보이지만,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잦은 근친혼이 프랑스 역사를 여러 번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프랑스의 기틀을 다진 건 위그 카페가 새로 세운 ‘카페 왕조’였습니다. 이들 역시 스페인 왕조처럼, 계속해서 가까운 친인척끼리 결혼을 했었지요. 고귀한 왕가의 혈통을 천한 사람의 피로 오염시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미남왕 필리프 4세를 묘사한 16세기 그림.
결국 사달이 터져 나왔습니다. 미남왕으로 통하는 필리프 4세 시절입니다. 그는 나바라 왕국의 공주 후아나와 결혼합니다. 외국 여성과 결혼이 무엇이 문제냐고 생각하시겠지만, 두 사람 모두 루이 8세의 증손자 증손녀였지요. 카페왕조에서도 근친혼 계수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아들을 셋이나 봤습니다. 루이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필리프 4세가 승하하더라도 왕조를 계승할 후계자가 셋이나 돼 든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아들 모두 10년의 통치기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물론 후사도 없었지요. 카페왕조의 몰락. 근친혼이 원인이었습니다.

필리프 4세의 세 아들은 근친혼의 영향 때문인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일찍 요절했다. 사진은 생드니 성당에 잠든 필리프 5세와 샤를 4세 부부. <저작권자=Roi Boshi>
전쟁의 씨앗이 된 근친혼
카페 왕조의 몰락을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한 남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자벨 드 프랑스. 프랑스 왕가의 후손이었지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면서 전쟁에 나선 배경입니다. 100년 전쟁의 서막이었지요.

프랑스는 가까스로 잉글랜드의 침략을 막아냅니다. 카페 왕조의 방계인 필리프 6세를 옹립하지요. 발루아 왕조였습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에게 사로잡힌 장 2세. 프랑스는 100년 전쟁 내내 대단히 고전했다.
발루아 왕조는 카페왕조의 실패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들 역시 근친결혼을 계속하면서입니다. 샤를 6세에 이르러서는 근친계수가 지나치게 높아집니다. 부모가 사촌끼리 결혼해서 낳은 아이와 같은 수치였습니다.
“적이다, 적이야”, “폐하, 저희는 충직한 신하입니다.” 샤를 6세가 자신의 수행원을 적으로 착각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샤를 6세는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병이 심했다. 근친혼의 영향이었다.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샤를 6세가 정신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광인왕’. 잉글랜드와 100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습니다.

광인을 리더로 삼은 나라가 순탄할 리 없습니다. 잉글랜드 헨리 5세에게 대패하고 결국 트루아 조약에 서명합니다. 샤를 6세 사후 왕위를 헨리 5세에게 넘긴다는 내용입니다. 샤를 6세는 자신의 딸 캐서린 드 발루아를 헨리 5세와 결혼을 시켰지요. 이제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근친의 결과를 잉글랜드에게 넘겼다
역설적으로, 이 굴욕적 ‘결혼’이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아들 헨리 6세가 정신병을 앓은 것입니다. 캐서린 드 발루아의 몸속에 내재한 정신병이 잉글랜드 왕가로 이어진 것이지요. (샤를 6세->캐서린->헨리6세) 프랑스 근친혼의 대가를 잉글랜드가 치르게 되는 셈입니다.
잉글랜드 왕 헨리 6세는 외할아버지인 프랑스 왕 샤를 6세로부터 정신병을 물려받았다. 프랑스의 재앙이 잉글랜드의 재앙으로 옮겨붙은 셈이었다.
마침 헨리 5세는 요절하고, 헨리 6세는 자신의 왕위를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1440년대부터 편집증과 불안이 시작되더니 나중에는 정신분열까지 왔을 정도였지요.

반면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앞 세워 잉글랜드를 대파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잉글랜드는 오랜 내전에 빠집니다. 장미전쟁이었습니다. 헨리 6세 역시 에드워드 4세의 반란으로 죽음을 당했지요. 근친혼 질병의 발현이 양국의 희비를 가른 셈입니다.

“잉글랜드 왕이 미쳤다고? 기회다!” 샤를 7세는 정신병을 앓는 헨리 6세에게 승리해 ‘승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장 푸케가 그린 샤를 7세 초상화.
영국의 혈우병 근친혼 속에서 퍼져나가다
근친혼은 역설적으로 국제 정세 재편의 실마리가 됐습니다. 대영제국을 이끈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모계를 통해 혈우병 인자를 보유하고 있었지요. 피가 나면 잘 굳지 않는 치명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우리 아들딸, 손주들 모두 유럽 왕가에 시집·장가 보내” 빅토리아 여왕 초상화.
빅토리아는 자기 자식을 유럽의 왕족들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끼리 다시 혼사가 이뤄지도록 근친혼을 주도했지요. 20세기 초 유럽 왕실의 왕손 대부분은 빅토리아의 손자·손녀였을 정도입니다. 빅토리아를 ‘유럽의 할머니’라고 칭하는 이유였지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은 금실이 좋아 여러 자녀를 낳았다. 무려 9명에 달하는 자녀들이 유럽의 왕가와 혼맥으로 이어졌다. 1857년 사진.
고결한 피를 보존하고, 영국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었지요. 근친혼이 비극의 씨앗이 되리라는 것을요.

유럽 왕실에 혈우병이 시나브로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영국 왕실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스페인·러시아 왕국이 혈우병으로 인해 귀한 손을 잃게 됐지요. 그 중 가장 큰 비극이 있었던 집안이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이 전파된 경로를 정리한 사진. 빨간색으로 표시된 인물들이 혈우병을 앓은 빅토리아의 후손들이다. <저작권자 Useravablack.hrek>
혈우병이 무너뜨린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부인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그녀는 빅토리아의 외손녀였습니다. 불행하게도 혈우병 인자를 보유하고 있었지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합니다. 알렉산드라는 혈우병 인자를 빅토리아로부터 물려받았지요. 두 사람은 1894년 결혼했지만, 딸만 내리 넷을 낳았습니다. 아들에 대한 욕구가 어느 때보다 컸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습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대를 이을 인물이었지요.

“우리 아들, 미래 러시아 황제를 살려야 해요.” 러시아의 마지막 황후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
“살고싶어요, 어머니.”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세손 알렉세이. 혈우병을 앓은 그는 1917년 결국 분노한 대중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겨우 13살이었다.
신은 로마노프 왕조를 외면합니다. 하필 혈우병 인자가 아들인 알렉세이에게 전해지면서입니다. 형제 중 유일한 환자였습니다. 알렉세이 누나 넷 중 누구도 혈우병을 앓지 않았던 것이지요.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는 아들의 치료에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왕조가 무너지는 걸 두고만 볼 수는 없어서였습니다.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기에, 결국 미신에 매달립니다. 나약해진 그들을 찾아온 이가 수도승 ‘라스푸틴’이었습니다. 그가 치료를 명분삼아 러시아 정치를 뒤흔든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고쳐드리지요, 하하.” 그리고리 라스푸틴 사진.
결국 대중의 분노가 터져 나왔고,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합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그들의 다섯 자식 모두 총살을 당하지요. 1917년의 일입니다. 지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절반으로 나뉘어 반목합니다.
“엿 같은 로마노프 왕조 무너뜨리자.” 황족 일가를 살해하는 혁명군을 묘사한 프랑스 잡지.
어쩌면 대한민국 분단의 비극 역시 유럽 근친혼의 나비효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부디 먼 곳에서 찾으시길. 반대가 끌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네줄요약>

ㅇ고대 왕조부터 중세 유럽에서 왕족간 ‘근친결혼’은 기본이었다. 고귀한 핏줄이 낮은 신분에 의해 오염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ㅇ근친혼은 끔찍한 부작용을 낳았다. 스패인 합스부르크는 ‘주걱턱’을, 프랑스 왕조는 왕조 교체를 당해야 했다.

ㅇ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은 손자·손녀들의 근친 결혼으로 전 유럽에 퍼졌다.

ㅇ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들어섰다. 근친혼 나비효과가 한반도에 퍼진 배경이다.

<참고 문헌>

ㅇ김동섭, 프랑스 왕실의 근친혼 이야기, 푸른역사, 2020년.

ㅇ앙드레 모루어, 프랑스사, 김영사,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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