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월급 2배”…그가 살아있었다면 ‘이 나라’ 자동차 파업은 없었다 [추동훈의 흥부전]
[흥부전-24][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19] 헨리 포드
미국은 현재 전미자동차노조 파업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포드와 GM, 스텔란티스 등 3대 자동차그룹 소속 노조 노동자들이 노조 창립이래 최초로 3사 공동 파업에 돌입하며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인데요. 4년간 40%의 임금 인상을 바라는 노조 측과 20% 이상은 절대 안된다는 사측의 정면대결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며 일부 생산 공장의 중단 사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내년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선 이 노조 파업의 유불리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심 참모까지 현장에 보내며 수습에 나서는 상황입니다. 이는 단순히 임금 인상의 문제 뿐 아니라 전기차 시대가 다가온 가운데 가솔린 등 기존 자동차 시대를 이끌어왔던 공장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생존권과 직결되면서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위기입니다.
과연 그 협상의 결론이 어떻게 될지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는 파업의 당사자 중 하나인 포드를 창업한 헨리 포드입니다.


포드가 14살이던 1876년, 그의 어머니 메리 포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포드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오느라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느릿한 마차로 인해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이때부터 마음 한켠에 자동차를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은 꽤 컸습니다. 장남인 헨리 포드는 농장을 이어받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농장에 대한 경멸을 느꼈습니다. 그는 나중에 “나는 농장을 특별히 사랑한 적이 없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농장의 어머니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농장과 어머니에 대한 상실로 그는 농장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가 13살이 되던 해, 그는 우연히 증기기관차를 직접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사람의 힘이 아닌 동력원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를 보고 다시 한번 탈 것에 대한 큰 흥미가 생겼습니다.
사실 포드는 중학교만 졸업한 중졸입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던 그는 16세에 집을 떠나 모터 시티, 디트로이트로 향합니다. 그는 그 곳에서 몇몇 제조기업에서 일을 합니다. 첫 직장은 제임스플라워앤브로스라는 곳이었습니다. 견습 기계공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고 솜씨가 좋은 기계공이었습니다. 또 웨스팅하우스의 휴대용 증기기관을 다뤄보며 동력원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키워 나갔습니다. 잠시 집으로 돌아와 가업인 농장 업무를 돌보던 그는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농기계를 몇 개 만들었고 증기를 동력원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폭발성이 있고 재사용에 시간이 걸리는 증기기관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한 그는 직접 엔진을 개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1887년 4사이클 엔진을 만들었고 1890년 2기통 엔진을 스스로 개발합니다. 엔지니어로서의 역량이 만개해가는 시점에 포드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 조명 회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에디슨은 그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맞습니다. 사업가이자 발명가인 둘은 서로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고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습니다. 포드가 기존 증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자동차가 아닌 휘발유를 동력원으로 한 차를 만들겠다고 말하자 그의 아내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토머스 에디슨이 그의 계획에 박수를 보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포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26마력의 힘을 낼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포드의 능력을 높이 산 투자자들은 포드를 수석 엔지니어로 해 1901년 헨리 포드 컴퍼니를 만듭니다. 그리고 헨리 리랜드라는 컨설턴트를 영입합니다. 하지만 포드는 자신이 주도하는 회사가 아니라며 이 회사를 떠났고 결국 이 회사의 이름은 그 유명한 캐딜락 자동차로 이름을 바꿉니다. 결국 또다시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포드는 1903년 미시간주 디어본에 헨리 포드 자동차를 창업합니다. 지금의 포드사의 모태가 되는 회사입니다. 창업초 여전히 문제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드는 자동차 공정상 그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고 그만큼 차의 가격도 높게 책정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고민하던 포드는 우연히 시카고의 한 도살장에서 쓰이는 컨베이어 벨트를 보고 영감을 얻습니다. 그는 1910년 자동차 공장에 차체 만들기, 타이어 끼우기, 차체 페인트 작업, 나머지 부품 조립, 최종검사, 출고 순으로 공정을 분류하고, 이를 가장 높은 4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며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동선을 꾸몄습니다. 부품들만 어지럽게 가득했던 4층이 공정 과정을 거쳐 완성된 차량으로 1층에서 등장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1913년 컨베이어 벨트 위로 작업을 모두 올리며 이제 작업자들은 그 자리에 서 있고 공정 과정이 흘러가는 방식으로 정리했습니다.

동일한 규격,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작업을 통해 항상 같은 작업이 반복될 수 있도록 품질을 끌어올립니다. 또 한 공장에서 단일 모델만, 단일 색상만 생산토록 해 시간의 낭비를 철저히 줄였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고 쌓이면 전문성이 축적됩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생산성 증대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작업에 필요한 부품들과 장비들을 올려 정해진 시간안에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이를 종합해 포드의 작업양식, 포디즘이라고 불리는 예술의 수준으로 높아진 작업 방식이 탄생합니다.


다만 너무 빨리 성공에 취해서였을까요. 모델T 중심으로만 전개된 판매 전략은 GM, 크라이슬러 등 후발주자들에 대한 견제에 실패했고 시장 경쟁력도 다소 빼앗기게 됩니다. 인기가 떨어진 모델T의 후속작 모델A는 1927년 출시됐고 이후 4년간 400만대 가량이 판매됐습니다. 이후 경쟁사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포드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갑니다. 포드는 1930년대에 유압식 브레이크, 금속 지붕 등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포드는 여러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기도 했고 다시 되팔기도 하며 흥망성쇠를 반복합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픽업트럭 모델인 F-150 시리지를 필두로 대표적인 미국 자동차 기업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헨리 포드의 상징성과 T모델T의 압도적 인기만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포드가 항상 강조해온 경영철학인데요. 이러한 철학이 자동차 생산 뿐 아니라 직원들을 대할 때도 잘 적용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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