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줘야겠다” 통보 받은 과학도들… “의대 갈 걸 후회한다”

2023. 9. 23.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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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불확실해 인력 빼는 연구실
"사명감 갖고 과학 하자 말 못해"
재정 어려우면 연구비부터 자를라 
이러니 너도나도 의대로 몰려간다
"국가 R&D 시스템 재정비 계기로"
게티이미지뱅크

"정부 연구비 삭감에 따른 예산 부족으로 금년까지 하고 나가주면 좋겠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납득하고 사표 내는 게 맞는 걸까요? 버티면 미움받겠죠?"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박사후연구원(포닥)으로 일하는 A씨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계약기간이 1년 넘게 남았는데 이달 초 갑자기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몰렸다. 또 다른 출연연의 박사후연구원 B씨 역시 "내년 여름까지 있기로 했었는데, 올해까지만 일하게 돼서 사기업에 지원 중"이라고 했다.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후폭풍이 시작됐다. 적잖은 연구실에서 내년 예산의 불확실성 때문에 박사후연구원이나 대학원생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장관이 직접 과학자들을 만나며 달래기에 나섰고 여당은 일부 R&D 예산 조정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지만, 현장 혼란은 이미 확산되는 모습이다. 과학계는 정부의 일방적 R&D 예산 삭감 발표가 이공계 이탈과 의대 광풍을 부추길 거라고 우려한다.


"사기 꺾이는 후배들 보기 괴로워"

이종호 장관을 비롯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들이 15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젊은 연구자들을 만나 연구개발(R&D) 예산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과기정통부 제공

“너 몇 년 차지? 5년? 그러면 2월까지 졸업해.”

생명과학 대학원 석·박사 통합과정에 재학 중인 김모씨는 이달 초 교수로부터 갑작스럽게 졸업을 준비하란 통보를 받았다. R&D 예산 삭감 발표 이후 연구실 재정이 어려워질 거란 이유에서였다. 통합과정은 졸업까지 평균 8년이 걸린다. 졸업하려면 적게 잡아도 3년은 남았는데, 내년 2월 연구실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김씨는 “연구 계획이 다 무너졌고 갑자기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며 한탄했다. 연구실의 다른 박사과정생들도 졸업 시기가 당겨졌다.

정부는 내년 R&D 예산을 깎겠다고 해놓고,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 예산을 얼마만큼 줄일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있다. 결국 연구책임자들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연구실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한다. 연구를 놓을 순 없으니 박사후연구원이나 대학원생 수를 줄이는 방법 말곤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출연연에 이어 대학원까지 흔들리면서 이공계 학생들은 동요하는 분위기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황모씨는 "앞으로 연구자로 일하려면 국내보다 해외로 나가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클 것 같다"고 말했다. 수도권 대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서모씨는 "의대에 가지 않은 게 후회된다"고까지 했다.

서울대 이공계열에 합격해도 지방 의대 가려고 반수, 재수, 삼수까지 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R&D 예산 삭감은 정부가 재정이 어려우면 연구비부터 감액하고 기초과학은 홀대한다는 인식을 심어준 셈이 됐다고 과학자들은 비판했다. 이공계 인재들 사이에서 자연대, 공대보다 역시 의대가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이공계 대학 교수는 "과학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뭐하러 과학을 하냐, 오지 마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출연연의 한 연구책임자는 "저와 일하는 포닥과 학생들에게 사명감을 갖고 과학도의 길을 가자고 자신 있게 말을 못하겠다"며 "의학, 치의학 전문대학원으로 빠진 옛 친구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후배들 사기가 꺾이는 걸 차마 못 보겠다는 그는 자신의 인센티브 절반을 포닥, 학생들과 나눴다.


학생 인건비 높인다는데...

지난해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이공계 석·박사과정생 규모는 2025년부터 본격 하락해 2050년 전후 현재의 절반 수준이 된다. 졸업자 수는 2030년 전후 2만 명 미만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안 그래도 연구인력 감소 추세가 뚜렷한데, 이공계 이탈이 가속화한다면 국가 경쟁력 하락은 불 보듯 뻔하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기초연구 환경 확립'을 약속한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와도 엇박자다.

이참에 대학원생 인건비 지급 구조를 개선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학생 인건비는 연구책임자가 정부 부처나 산업체로부터 수주한 연구과제의 연구비에서 참여 비율에 따라 떼어주는 방식이다. 과제 규모가 축소되면 대학원생이 받을 수 있는 인건비도 줄어든다. 과기정통부는 "학생 인건비 의무지출 비율을 상향하겠다"고 했지만, 구체적 방안은 내놓지 않았다. 현장에선 정부가 학생 인건비 기준 금액을 높여도 지도교수가 참여 비율을 낮추면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이동헌 KAIST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이공계 연구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 결정"이라며 "(R&D 예산 일방 삭감 같은) 이런 정책이 누적되면 우수 인력들이 이공계를 선택하지 않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방 소재 대학에서 기초과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유사 연구 중복, 관리 소홀 같은 부작용은 차단하면서 기초연구 투자는 꾸준히 이어갈 수 있도록 다부처 국가 R&D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소형 과학전문기자 precare@hankookilbo.com 문예찬 인턴기자 moonpraise@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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