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김홍일 장군, 불의와 타협 안 한 참군인…독립운동 정신 계승해야"

2023. 9. 23.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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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홍일의 아들 김덕재 씨가 20일 서울 종로구 명동 한 호텔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상선 기자
22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는 국가보훈부가 마련한 김홍일 장군(1898~1980)의 제4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김 장군은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의기투합해 이봉창·윤봉길 의거에 쓰인 폭탄을 제공했고, 광복 후 6·25 전쟁에서도 경기 시흥지구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1주일간 방어해 국군의 괴멸 위기를 막아내는 업적을 세웠다. 추모제 참석차 방한한 김 장군의 셋째 아들 김덕재(88·사진·미국 거주)씨는 2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참군인이었다”며 고인의 정신을 기렸다.
Q : 장군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은.
A : “중국 상하이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모든 힘을 쏟느라 거의 집에 안 들어왔다. 한국에서 재회한 뒤인 1948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결혼 25주년인데 함께한 시간은 3년도 안 된다’며 미안하다고 할 정도였다. 상하이에서 아버지 없이 살던 시절 일본군은 사복 차림으로 위장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어머니한테 행패를 부리는 등 감시를 이어갔다. 아버지를 돕던 중국군이 상하이를 떠나야 한다며 나와 어머니에게 짐을 싸게 해서 피신해야 했다.”
김홍일 장군 추모제에서 묵념하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오른쪽 둘째). [사진 국가보훈부]

Q : 자라면서 알게 된 장군의 성품은 어땠나.
A : “아버지는 ‘정대광명(正大光明) 애국애민(愛國愛民)’이라는 가훈을 항상 강조했다. ‘정직하고 밝은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본인 역시 그에 맞게 생활하면서 사치와 같은 사욕을 멀리했다. 6·25 전쟁 때 한 번은 부관이 집에 쌀가마니를 가져왔다. 우리 가족을 잘 챙기려고 그런 거였지만 아버지는 필요 없다며 부관을 혼내서 돌려보냈다. 광복 직전엔 일본군이 귀금속을 훔쳐 달아나는 걸 부산에서 잡은 일이 있었다. 노획한 귀금속을 동료 군인들이 하나씩 가지려고 하자 아버지는 안 된다며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공과 사의 구분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Q : 김구 선생 등과 독립운동에 얽힌 일화는.
A : “김구 선생은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우리 가족을 챙겼다. 윤봉길 의거가 결정됐을 때, 아버지는 중국 공장에서 만든 폭탄을 가져와 윤봉길 의사에게 그 폭탄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고 (윤 의사를) 직접 훈련시켰다. 광복 후에도 김구 선생과는 뜻이 잘 맞았다.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졌을 때 아버지는 김구 선생과 함께 크게 실망했다. 북한이 왜 소련 말을 듣고 같은 민족과 싸우려 하느냐, 작은 나라가 어렵게 독립했는데 똘똘 뭉쳐야만 한다는 게 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Q :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후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A : “협치가 중요한데 한국은 정쟁이 너무 심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합심해서 기적을 일으켰던 독립운동의 정신을 후손들이 잘 계승했으면 한다. 남북 평화 통일도 빨리 되면 좋겠다. 다만 북한은 문제가 많은 독재 정권이다. 국부(國富)를 거기에 퍼줘선 안 된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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