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항아리의 세계

2023. 9. 22.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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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짜낸 향기로운 기름 가득든 항아리
유머·포용으로 인생의 충만함 그려

츠쯔젠, ‘돼지기름 한 항아리’(‘물결의 비밀’에 수록, 구수정 외 옮김, 아시아)

이 단편소설과는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내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유년 시절의 사물 중 하나는 항아리가 아닐까 싶다. 반찬이 없을 때라도 장독대에 줄줄이 늘어선 항아리들에서 김장김치, 동치미, 백김치 등을 꺼내오면 금세 밥상이 풍성해졌고 된장, 고추장, 천일염도 언제나 항아리 안에 있었다. 먼 나라의 사막에서 부친이 보내온 편지들도 항아리에 담게 되었다. 어린 눈으로 볼 때 어른들은 모든 필요하고 유용하며 좋은 것은 항아리에 담아두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커서는 부모 몰래 다른 비밀스러운 것들을 숨겨 두는 용도로 사용하긴 했지만.
조경란 소설가
소설에서 ‘항아리’라는 사물이 등장하면 그 속에 중요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거나 항아리가 깨지거나, 독자의 허를 찌르는 뜻밖의 것이 새로 담기거나 할 가능성이 크다. 이야기의 전통적 규칙이라기보다는 소설에서 사물이 쓰이는 상징적 방식으로 보면. ‘루쉰 문학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작가이며 “대담하고 놀라운 이야기꾼”인 츠쯔젠의 소설을 읽을 때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그녀가 또 얼마나 치밀한 방법으로 인생의 너그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까 기대가 된다.

임업 노동자로 일하러 떠난 남편에게 어느 날 그녀 앞으로 편지가 온다. 조직에서 가족을 위해 생활비와 숙소를 제공하니 지금 집을 처분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비스듬히 기운 데다 두 칸짜리 토방인 집은 처분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돼지 잡는 일을 하는 한 이웃이 돼지기름과 집을 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당신이 갈 곳은 내내 겨울이며 먹을 것도 콩밖에는 없고 생선과 고기는 구경하기도 어렵다고. 돼지기름 없이 음식을 하다니. 그녀는 그 이웃을 따라가 돼지기름 한 항아리를 받아 왔다. 설청색 항아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길상의 기운이 넘친다고 할까. 게다가 속에는 새로 짜낸 향기로운 돼지기름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웃은 그녀에게 당부했다. 특별히 그녀를 위해 준비했으니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돼지기름을 먹이지 말라고.

그녀는 항아리를 등에 지고, 아이 셋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1956년 7월의 우기였다. 먼 길이었다. 마차, 기차, 화물차, 배를 갈아타는 동안 항아리를 탐내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나 많은지. 남편이 마중을 보낸 추이따린을 만나 임업경영소를 가는 숲길에서 소수민족인 오르촌족 사람들이 말을 태워 주겠다고 했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그녀는 등에 돼지기름 단지를 멘 채 말 등에 올라탔다. 버드나무 수풀을 지날 때 말이 돌멩이에 발이 걸려 말에서 떨어지게 될 줄 모르고. 그만 항아리가 깨져버렸다. 쏟아진 돼지기름이 아까워서 그녀와 추이따린은 밥그릇과 펼친 기름종이 우산에 풀과 개미들이 묻어버린 돼지기름을 그러모았다. 다행히 그녀는 “무슨 일이든 오래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돼지기름으로 산나물과 버섯 요리를 하고, 막내아이 마이가 생기는 동안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추이따린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여교사 청잉과 결혼을 했다. 마이는 목재를 운반하는 뗏목을 띄우는 일을 하게 되었다. 마이가 뗏목을 띄우면 바람도 잔잔하고 물결도 일지 않아 행운아라는 별명이 붙었다. 마이가 18세가 되던 해 강에서 크고 붉은 배의 열목어 한 마리를 잡아 왔다.

이 단편소설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여기까지 홀린 듯이 따라 읽는 동안 ‘항아리’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갓 짜낸 향기로운 기름이 든 항아리 안에는 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그녀는 훗날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항아리에 든 것을 갖지는 못했어도 “아직 살아서 자식과 손주들이 집안에 가득하다”고.

소설의 많은 인물 중 결국엔 누구도 싫고 미운 사람이 없게 만드는 걸 보니 역시 츠쯔젠이다. 회한과 거짓말도 유머와 포용으로 녹아 들어버린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충만함이 남는 것. 이것이 츠쯔젠이 그려 보이는 달처럼 둥근 항아리의 세계가 아닐까.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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