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말도 건져 올리지 않는, 밤[책과 삶]

백승찬 기자 입력 2023. 9. 22. 21:3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촉진하는 밤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176쪽 | 1만2000원

‘밤’은 김소연 시인의 새 시집 <촉진하는 밤>의 주요 시어다. 표제시 ‘촉진하는 밤’에는 “열이 펄펄 끓는” 누군가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며 밤을 새우는 시적 화자가 등장한다. 간병하는 화자는 밤새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풀어놓는가 하면,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다음날이 태연하게 나타”나자 화자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을 느낀다.

‘푸른얼음’에서는 엄청나게 다양한 밤의 풍경이 묘사된다. “나를 숨겨주는 밤 더 많은 나를 더 깊이 은닉해주는 밤 두 손을 둥그렇게 모아 입가에 대고서 들어주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소리치고 싶은 밤 과즙처럼 끈적끈적한 다짐들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밤 (…) 귀한 것들을 벼랑 끝에 세워둔 것처럼 기묘하고 능청스러운 밤.”

시인에게 밤은 양가적이다. “너무 많은 말이 밤으로” 밀려들지만, “밤은 오늘도 성긴 그물처럼 그 누구의 말들도 건져 올리지 않”는다. 밤은 시인이 “저녁에 읽은 문장 하나를 받아 적으며 미소 짓는 관념적인 밤”이 되기도 하지만, “온갖 주의 사항들이 범람하는 밤”이기도 하다.

5년 만에 나온 시집이자, 데뷔 30주년에 나온 여섯번째 시집이다. 6년에 한 권꼴이니 과작이다. 김언 시인은 해설에서 “극단의 내면 풍경이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도정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며 “하루하루의 끝을 누구보다 오래 붙들고 말하는 자가 어쩌면 시인”이라고 적었다. 김소연이 그런 시인이라면, <촉진하는 밤>은 5년간의 밤에 붙들었던 생각과 말들을 곡진하게 눌러놓은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끝까지 갈 때마다 끝은 없다 끝을 번번이 지나친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Copyright©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