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을 포기하면서 작가로 탄생하는 문체[신새벽의 문체 탐구]

기자 입력 2023. 9. 22. 21:16 수정 2023. 9. 2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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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문학과지성사 | 320쪽 | 1만3000원

“행동가는 작가가 되려다 좌절한 사람이죠.”

2023년 올해가 사망 20주기인 칠레 출신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한 말이다. 47세의 볼라뇨는 말했다. “만약 돈키호테가 기사도와 관련된 책을 한 권이라도 썼다면 결코 돈키호테가 되질 못했을 겁니다. 저 또한 글 쓰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지금쯤 FARC(콜롬비아 반정부혁명군)와 함께 총이나 쏘고 있겠죠.”

보통 ‘작가는 행동가가 되려다 좌절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나? 볼라뇨 팬으로 알려진 정지돈의 첫 번째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를 읽으면서 어떻게 작가가 되는지 탐구했다. 책을 한 권이라도 쓰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 번째 책을 쓰고 있는 필자는 모른다. 그의 원고를 교정하고 있는 나도 모른다. 편집자들끼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번 입을 열면 쉽사리 말을 멈추지 않는 사람, 그는 작가다. 학자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내용을 시적으로 써버리는 사람, 그는 작가다. 자기만의 연구 주제를 만천하에 발표하는 사람, 그는 작가다 등등. 이것은 ‘작가’를 대하는 편집자의 찬탄과 부담스러움을 표출하는 뒷공론이니 작품을 읽으면서 검토해보자.

2016년 출간된 <내가 싸우듯이>의 문체는 이미 왈가왈부를 겪었다. 참고 문헌이 실려 있고 찾아보기까지 있는 단편집은 실제 인물과 사건이 허구와 얼기설기 엮이는 식으로 쓰여 있다. ‘지식조합형 소설’ ‘도서관 소설’로 불리기도 했는데 아는 게 많고 읽은 책이 많으며 간결하기보다는 장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이 많다고 바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를 시도해본 사람은 알듯이 명문장을 쓰려고 하면 한 문단도 끝내기 어렵다. 특히 글이 흔한 오늘날에는 일단 써내리고 꾸준히 발표하는 사람이 작가에 가까워진다. 정지돈은 역사를 제시하고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명을 대고 단행본 서지사항을 읊으면서 지면을 채운다. “테헤란 출신의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가 죽은 날은 1951년 4월4일이다.” 실존 인물인 사데크 헤다야트의 책에서 제목을 따온 단편 ‘눈먼 부엉이’의 한 대목이다. 검색해보면 헤다야트가 죽은 날은 4월9일이지만, 사실과 허구를 조합하면 서술 방법이 더 다양해지지 않겠는가.

물론 책은 지식의 조합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역사학자가 사료를 파고들고 철학자가 논증을 펼칠 때 작가는 문장을 자아낸다. 사실 고증, 논리적 서술과 구분되는 ‘문학적’ 문장을 구사하는 ‘눈먼 부엉이’ 부분을 보자. “해프닝은 무의미로 의미를 건져내는 얼음낚시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겨울과 몸, 얼음과 물의 충돌. 크레바스에 빠진 소년을 건져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표현에 웃음을 짓거나 감수성이 건드려지는 사람은 팬이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작가를 의심하게 된다.

독자는 작가의 진실을 찾는다. 작가는 진실을 찾고 싶지만 진실이라는 걸 의심한다. ‘진실’이라고 따옴표를 쳤다가도 마침내 진실의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이 작품을 이룬다. <내가 싸우듯이>의 주제는 예술의 진실인데, 예술을 믿는 인물과 그런 건 잘 모르겠다고 하는 인물이 번갈아 등장한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 ‘눈먼 부엉이’의 후반부 중에서도 마지막 문장이 관건이다. 진지함을 의심하는 ‘나’가 문장들의 조합에 굴곡을 줌으로써 사건을 만들고, 단편 소설을 성립시킨다. 쓸모가 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순문학을 의심하는 나가 완성시킨다. <내가 싸우듯이>는 구호나 감정이입이 아니라 레퍼런스로 작품을 생산한다. 콘텐츠 시대의 책은 게임, 드라마, 뮤지컬에 비해 월등히 시장 규모가 작고 소비자의 집중력을 스마트폰에게 도둑맞지만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세계는 슬프지 않고, 세계는 크다.”(‘주말’)

권말에 직접 쓴 작품론에서 정지돈은 ‘문학을 위한 문학’과 ‘혁명을 위한 문학’이 폭발했던 모더니즘 시대를 지나 이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문학을 말한다. “논픽션인가, 에세이인가, 자서전인가. 이건 그냥 책이다.”(‘일기/기록/스크립트’)

이건 ‘행동가인가, 작가인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내가 싸우듯이>에서 이슬람 정권의 탄압을 받은 사데크 헤다야트, 쿠데타 정부에 고문당한 레이날도 아레나스, 동료들에게 멸시받은 페넬로페 질리아트의 투쟁들은 ‘작가’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모티프로 보면 ‘책 속의 책’에서 ‘폭력과 싸우는 작가’까지 볼라뇨식이지만, 구성 형식으로 보면 허구의 전기를 배치하는 볼라뇨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아카이빙하는 W G 제발트에 가깝다. 아카이빙된 역사는 멜랑콜리에 빠지니, 행동의 가능성을 찾는 작가라면 다른 방식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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