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길’ 따라 전달된 편지, 지식을 전파하고 공동체를 묶어주다[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고대 지중해 세계가 구축했던 공통의 문화적 코드 속에서 뜨거운 경쟁을 거쳐 자유롭게 진리를 추구했던 지식의 연결망은 정치·사회·경제의 격변 속에서 군데군데 끊어져 외로운 점들로 흩어지게 된다. 마치 남쪽과 북쪽의 전기적 연결망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한반도 밤하늘의 촬영 영상처럼, 한때 지식을 소통하며 반짝거렸던 몇몇 지식의 발신지들에서 지식의 불빛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할 이야기는 이런 그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헬레니즘 시대 곳곳으로 확산시켰던 그들의 유산은 문학, 역사, 철학, 수사학, 지리학, 의학, 과학 등 광범위한 주제에 걸쳐 있었으나 이성적 진리를 발견하고, 설득하고, 검증하기 위한 논변과 연설의 전통이 이러한 탐구들의 공통적인 기본 바탕이 됐다.
370여개 주요 가도 중심으로
총 8만㎞ 달했던 로마의 길
제국 자원 옮기는 핵심 동맥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구축했던 이 지적 전통은 로마인들이 닦아놓은 길들을 통해 흘러나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Omnes viae Romam ducunt)”는 말처럼 370여개의 주요 가도를 중심으로 총 8만㎞에 달했던 로마의 길은 제국의 중요한 인적·물적 자원들을 옮기는 핵심 동맥이었다. 히스파니아 지방 지브롤터 해협부터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에 이르기까지 곳곳으로 뻗어나간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헬레니즘 시대 지중해의 해상을 통해 전해지던 그리스의 지식과 생각들이 길을 따라 전해졌고, 아피아 가도를 통해 로마로 들어갔던 사도 바울도 로마의 길 덕분에 훗날 로마 제국과 이후 유럽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걸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의 걸음이 고대 세계의 소통과 교류의 연결망이 됐다.
‘길’이라는 물리적인 연결망이 확장된 덕분에 지난번에 잠시 살펴봤던 것처럼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 생각을 나누는 일들이 더 수월했다. 사실 어쩌면 아르키메데스는 편지를 보냈을 뿐이었고 답신을 받지는 못했는데, 그때로부터 200~300년이 지나 로마가 이끄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편지가 한 번 발송됐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오고 갔을 정도로 서신 교환이 더 활발해졌다. 이번 글에서는 편지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어떻게 지식 공동체의 형성에 기여했고, 그로 인해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 소통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먼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편지가 무엇이었을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관습에 비춰볼 때, 인사말과 맺음말, 그리고 발신인과 수신인이 포함된 기록물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 조건을 만족한 경우라도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편지의 범주에 넣을지 말지 망설여지는 고대의 기록물이 꽤 많이 남아 있다. 발신자들은 광범위한 연대 및 지리적 범위에 걸쳐 글자를 보존하는 데 적합한 거의 모든 재료, 이를테면 점토판, 가죽, 납, 목판, 파피루스, 돌, 양피지와 같은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정의하기 애매한 이런 성격 때문인지 아직 학자들은 고대 지중해의 세계에서 서신 교환이 갖는 특성과 역할들에 대해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심을 쏟지 못한 상황이다.
비록 편지를 하나의 장르로 정의하는 일이 아직 완전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편지가 구술과 기록의 장점을 모두 가진 매력적인 매체라는 점이다. 편지에는 그 편지를 받아볼 수신인에 대한 친밀한 유대감 속에서 다른 일반적인 기록물에 비해 보다 더 친근한 어투가 담겨 있다. 때로 편지 안에 발신자의 어떤 지시나 요청이 담긴다 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강압적인 힘으로 윽박지르기보다는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과 함께 설득하는 부드러운 톤으로 그 요청을 전달하곤 한다. 편지가 여전히 기록된 글자들로 구성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읽을 때 발신인의 감정을 다른 무딘 기록물보다 더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런 구술의 장점을 갖는 동시에 편지는 발화되고 사라지는 말과는 달리 오래 지속된다는 기록으로서의 장점도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때로 연설을 마치고 나서 그 발표된 연설을 일종의 편지 형태로 보급하기도 했는데, 이 덕분에 지금도 남겨진 연설문들을 통해 당시의 정치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편지들이 때로 공공의 일과 관련된 기록을 담고 있을 경우 이 편지는 공동체의 기억을 함께 저장해 보존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학자들은 편지가 말과 글의 성격을 유동적으로 갖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때로 기록된 편지가 특정된 수신인뿐 아니라 그 수신인이 속한 지역 공동체에서 공개적으로 읽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에 포함된 여러 서신서들은 공동체로 모인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 앞에서 읽히기도 했고, 그런 덕분에 ‘시각적’으로 읽도록 기록된 편지가 ‘청각적’으로도 더 친밀하게 소비될 수 있었다.
물론 뒤집어 생각해보면, 구술과 기록의 사이에서 편지가 갖는 이 독특한 지위는 때로 애매한 매력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도 중요한 사안을 전화로 말하기보다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공화정 로마에서도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편지에 적어 논의하는 것을 적절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도 청중과 연사 사이에 시각, 청각, 촉각, 후각의 강렬한 감각적 상호작용이 있었는데, 그에 비해 편지에 적힌 글들은 사안의 중요성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 속 편지는
지식 소통에서 중요한 역할에
피쿠로스 철학 학파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대표적
그러나 우리가 집중하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의 지식 소통에서 편지는 압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의 속주들로부터 수도 로마로, 또 반대로 로마에서 각 속주들로 필요한 정보의 교환은 상당 부분 각 속주와 로마를 오가는 편지를 통해 이뤄졌다. 그래서 로마의 황제들은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통치하는 제국 구석구석이 함께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는 데 있어 편지는 가장 요긴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편지는 황제의 편지에서처럼 어떤 정치, 경제, 안보와 관련된 정보들을 담았을 뿐 아니라, 지중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었던 공동체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중해 유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편지의 교환을 통해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었다. 편지를 통해 활발하게 번성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커뮤니티로 학자들은 에피쿠로스 철학 학파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주목해왔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던 고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세네카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고대 철학자보다 더 많은 편지를 썼던 철학자다.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에피쿠로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편지를 쓰긴 썼지만, 에피쿠로스의 제자들은 스승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활발하게 서로 서신을 교환하며 여러 주제에 걸쳐 적극적으로 지식을 소통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에피쿠로스가 썼던 논고들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그가 물리학, 천문학, 기상학, 윤리학을 논했던 편지들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애> 안에 담겨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의 전개에 있어서 편지가 얼마나 중요한 방편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편지에 담긴 내용은 크게 다른 것이었지만, 사도 바울도 그의 전도 여행을 통해 세웠던 혹은 교제했던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수차례 사람들을 보냈고, 그편에 편지도 함께 보내 그가 평생을 헌신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몇몇 학자들이 언급한 바 있지만, ‘편지’라는 평범한 방식의 글이 ‘성경’에 포함되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는 점은 편지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지식과 문화를 전파하고, 공동체를 묶어주고 이어주던 로마의 길은 역설적으로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가 그토록 빠르게 몰락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들이 제국의 통치와 군사의 빠른 전개를 위해 닦아뒀던 이 길들이 거꾸로 야만족들이 영원의 도시 로마를 약탈할 가장 좋은 진입로였기 때문이다. 서기 410년의 일이었다.
연결망이 끊어진 중세 천년
지식 소통 측면선 외로운 공간
되새김 행위는 인류사에 의미
이때로부터 혹은 그 언저리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대략 천년의 시간을 우리는 중세라고 부른다. 나는 ‘중세’라는 이름 자체가 불편할 때가 있다. 마치 매력적이던 고대와 다시 찬란하게 부활한 근대 ‘사이에’ 끼어 무언가 덜 흥미로운 시대로 생각해왔던 지난 편견들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중세에 대한 연구들이 계속 발전해오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놓쳤던 중세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해가고 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지식의 소통이라는 차원에서만 보자면 중세는 어쩐지 외로움이라는 정서로 느껴질 때가 자주 있다. 서두에 꺼내들었던 비유처럼 곳곳에서 자주 반짝이던 지식의 발신과 수신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이제 드문드문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의 창조보다 생존의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한 때가 한동안 펼쳐질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이 연결망이 끊어지고 모든 주변상황이 요동하는 상황에서도 지식을 갈구하던 이들이 있었다. 마치 전쟁 중에도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걸렸던 단 한 점의 미술전시를 보기 위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처럼, 안전과 평화가 담보되지 않았던 때에도 지식의 풍요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이 주해를 달고, 필사하고 번역하면서 그들에게 남겨진 ‘지식의 유산들’과 대화를 이어간 덕분에 그 지식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이 지식을 계승하던 사람들이 남겨진 기록을 옮겨 쓰면서 지식의 유산과의 대화를 이어가던 공간,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의 공기는 때로 지나치게 외로운 것이었지만, 때로 이 홀로 반추하는 행위가 중세 시대의 새로움의 원천이 되었다. 반대로 현대인들은 지나친 소통 과잉(그로 인한 정보 과잉)으로 인해 성찰할 시간을 뺏기고 있다. 키신저가 말한 대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넘쳐나면서 사용자들은 자기 성찰에서 멀어지고, 기술에 친숙한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그들이 두려워하는 고독을 피하고 있다. 이러한 지나친 정보와의 얽힘이 창의성의 본질인 외로운 길을 걸어야만 구현할 수 있는 신념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내심을 약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지식의 소통과 관련해 고대의 경쟁적 지식의 소통, 로마의 길을 따라 곳곳으로 전달된 지식의 확산, 다시 중세의 외로운 공간에서 남겨진 것들을 곱씹으며 되새긴 지식의 재해석, 이 모든 것들이 다 그 나름대로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다음번에는 근대의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 어떻게 탄생했고, 또 어떤 측면에서 기존 지식의 소통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는지 생각해볼 것이다.
이은수 교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이은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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