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사적제재’ 뿌리 뽑으려면

몇 년 전, 소위 명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마친 뒤 교단에 섰던 지인 A는 자신이 출제한 시험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시험을 치른 뒤 학생들에게 해설해 주는 과정에서 해당 문제를 가리켜 “쉬운 문제였다”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한 학생의 학부모가 A에게 항의했다. 자신의 아이가 그 문제를 틀렸는데, A가 그걸 ‘쉬운 문제’라고 말하자 아이 기분이 상했다면서 학부모는 A의 사과를 요구했다. 급기야 시험 문제 오류가 의심된다며 민원을 제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A의 출신 대학교까지 트집을 잡았다. A는 이 사실을 윗선에 알렸지만 학교 측은 “(학부모와) 잘 해결해 보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최근 들어 학부모의 교권 침해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삶을 등지는 교사가 많아지자 대중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전관평초등학교 교사 사망, 의정부호원초등학교 교사 2인 사망 사건 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악성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한 소셜미디어(SNS)에도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신상을 공개한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워 수는 3만명을 넘었다. 아직 미성년자인 것으로 알려진 계정 운영자를 향한 응원도 이어지고 있다. 촉법소년이라 타인의 신상을 공개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이른바 ‘촉법나이트’(촉법소년과 영화 ‘다크나이트’의 합성어) 등장에 대중도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사적제재에 대한 환호는 악성 민원인을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으니 사적으로 제재해서라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함의가 깔려있다. 그간 교사를 비롯해 경찰 등 일선 공무원은 도 넘은 악성 민원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은 일을 키우지 말라며 담당자에게 사과와 합의를 종용했다. 실랑이를 벌이다 고소장을 받아도, 폭언과 폭행을 당해도 실무자를 지켜줄 울타리는 없었다. 체계와 규범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무책임만 가득 차 있던 것이다. ‘신상 공개’라는 사적제재가 뿌리를 내린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잘못을 묻겠다고 등장한 사적제재 역시 법적으로 처벌 대상이다. 정보통신망법 70조 1항은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개된 정보가 허위 사실이라면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명예훼손에 비해 사적제재는 ‘비방할 목적’ 요건까지 더해져 가중처벌 대상이 된다.
텔레그램에 성 착취 동영상을 유포한 ‘n번방’과 ‘부산 돌려차기’ 등 대중을 분노케 한 사건이 터지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적제재. 범죄가 발생한 뒤 사적제재를 목적으로 한 신상공개라는 또 다른 위법한 행위가 연이어 벌어지는 혼란을 바로 잡으려면 규범과 제도를 공고히 만드는 방법뿐이다.
최근 대법원은 자격을 갖춘 교사의 교육활동을 침해하거나 부당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판례를 제시했다. 국회는 ‘교권4법’을 통과시켰다. 교원의 정당한 생활지도는 아동학대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각 지방자치단체도 폭언·폭행에 대한 대응 절차를 마련하고 있다. 과거보다 엄격히 대처하겠다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많은 교사들이 자괴감을 느끼고 교단을 떠나고 있다. 시험 문제 사건으로 학부모와 실랑이를 벌인 A는 자신의 출신 대학교를 밝히자 학부모 항의가 사그라들었다는 사실에 못내 씁쓸해했다. 그 전에 학교가 나서 악성 민원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줬더라면, 규범이 교사를 보호해줬더라면 애정을 가졌던 교단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이제는 선을 넘는 과도한 요구와 주장에 대해 국가가 나서 실무자를 보호하고 악성 민원은 법적으로 책임을 묻는 등 허물어진 체제를 재정비해야 할 시점이다. 소를 잃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캐나다로 떠날 채비하는 도산안창호함… 60조 잠수함 수주 막판 ‘승부수’
- [단독] 현대해상, 직원에 특별 격려금… 경영목표 미달에 경영진은 급여 반납
- 주가 4배 뛴 미래에셋증권, 박현주 회장 선구안 빛났는데… 정작 직원들은 주식 정리했다
- 유업계, 비만치료제 확산에 소화 불편 관리하는 제품군 강화
- [美 이란 공습] 중국인 이란 탈출에… ‘억대’ 편도 항공권 등장
- 강남 신축 아파트 ‘위반건축물’ 딱지 붙어도 불이익 ‘제로’
- [르포] 금형부터 양산까지 ‘원스톱’... 유아이엘, 전장·전자담배 신사업으로 외형 확장
- 서울숲 옆 48층 아파트·호텔에도 부영 ‘사랑으로’ 붙일까
- [르포] “강남 수준입니다”… 길음뉴타운 국평 전세값 11억원
- 공장 짓고 兆단위 투자… ‘유럽 인사이더 전략’으로 승부수 던지는 K방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