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여성 전용 호텔 ‘바비즌’=여성 인권 바로미터…‘호텔 바비즌’[책과 삶]

최민지 기자 2023. 9. 2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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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부촌에 1920년대 여성 전용 호텔
일하는 중산층 백인 여성의 공간
참정권 얻은 여성 사회 진출 상징
혐오대상에서 ‘핫플’까지
여성운동 이후 쇠락, 지금은 콘도로 변

폴리나 브렌 지음·홍한별 옮김 | 니케북스 | 416쪽 | 2만4000원

1928년 문을 연 바비즌 호텔은 독립적인 삶을 살려는 여성들을 불러들였다. 니케북스 제공

<브루클린>(2015)은 1950년대 초 젊은 아일랜드 이민자 ‘에일리스’의 뉴욕 정착기를 그린 영화다. 식료품점 점원 에일리스는 전쟁 후 극심한 경제난에 빠진 고향을 등지고 뉴욕행 배에 오른다.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이유에서였다. 에일리스는 브루클린의 하숙집에 자리를 잡고 낮에는 고급 백화점에서 일한다. 퇴근 후에는 야간대학에서 공부하며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한다. 에일리스는 하숙집의 여성들과 울고 웃으며 조금씩 ‘뉴요커’로 성장한다.

뉴욕의 여성 전용 호텔 ‘바비즌’을 다룬 책 <호텔 바비즌>을 읽기 시작했을 때 이곳을 거쳐간 여성들 역시 에일리스와 비슷한 삶을 살았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책에는 지금껏 제대로 다뤄진 적 없는, 꿈을 좇은 여성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국제학·젠더학·언론학자인 저자는 1920년대 호텔이 개장한 시점부터 2007년 수백만달러 가치의 콘도미니엄으로 재개장하기까지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놓는다. 호텔 바비즌의 흥망성쇠는 미국 사회 여성인권의 진보 및 후퇴와 밀접하게 엮여 있었다.

바비즌은 1928년 맨해튼의 부촌 어퍼이스트사이드에 문을 열었다. 총 23층인 건물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700개에 달하는 객실 외에 레스토랑과 도서실, 체육관, 수영장을 갖췄다. 라운지에는 오르간 같은 악기와 함께 300명이 한꺼번에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1층에는 미용실, 세탁소, 서점 등 상점이 입점해 있었다.

‘일하는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다. 1차 세계대전 뒤 참정권을 획득한 여성들은 이 시기 맨해튼의 고층 빌딩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브루클린>의 에일리스와 다른 점이라면 이들은 중산층의 화이트칼라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돈만 있다고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추천서를 내고 호텔의 기준(주로 나이와 외모)을 통과해야만 했다.

호텔의 깐깐함은 바비즌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1920년대는 여성 전용 레지던스의 전성기로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바비즌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주로 받으며 호텔의 평판을 드높였다. 바비즌 근처에는 이 ‘금남의 공간’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남자들로 바글댔다. 개중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같은 유명 인사도 있었다.

호텔 바비즌의 흥망성쇠는 미국 사회 여성 인권의 진보, 후퇴와 밀접하게 엮여 있다. 니케북스 제공

저자는 바비즌과 이곳 여성들이 시대 흐름에 따라 얼마나 다른 취급을 받았는지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1920년대 취업 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남성성의 위기’가 닥치자 노골적인 혐오의 대상이 됐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전장으로 떠난 남자들 대신 다시 일을 하게 됐지만, 1950년대 전후 불어닥친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바비즌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남성을 위협하지 않는’ 일, 즉 아름다운 외모를 무기로 한 배우나 모델들이 주로 바비즌에 머물렀고 이 중에는 훗날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있었다.

1960년대 여성주의 운동과 함께 바비즌의 쇠락은 시작된다. 1970년대에는 과거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뉴욕의 싱글 여성들은 이제 바비즌이 아닌 유명 디스코 클럽 ‘스튜디오54’에 모였다. 이들에게 바비즌은 철지난 가치를 추구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1980년대에 이르러 호텔의 재정 상황이 악화됐고 결국 남성 입주자를 받기 시작했다.

현재 고급 콘도미니엄으로 변모한 바비즌의 모습. 바비즌63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리모델링을 통해 재기를 꿈꾸던 호텔은 2007년 결국 부유한 이들을 위한 콘도미니엄으로 탈바꿈한다.

저자는 호텔 바비즌의 빛과 어둠을 함께 조명한다. 바비즌은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을 제공하는 한편 이들을 상품화하고 이들의 매력으로 호텔의 명성을 드높였다. 호텔의 남성 출입금지 정책 역시 입주자가 ‘조신한 여성’임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하이힐을 신지 않고 슬랙스를 입은 여성은 호텔 평판을 망치는 나쁜 입주자 취급을 받았다. 인종적 한계도 분명했다. 호텔은 중산층 백인 여성을 타깃으로 영업했으며 첫 흑인 여성 입주는 개장 29년차인 1956년에야 이뤄졌다.

그러나 이 ‘20세기의 모순’은 호텔 바비즌 혼자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저자 폴리나 브렌은 말하는 듯하다. 브렌은 여성의 최종 목표가 ‘괜찮은 남성과 결혼해 아이 낳고 사는 것’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얼마나 거셌는지 강조한다. 그럼에도 싸움을 계속한 여성들과 그들에게 ‘자기만의 방’을 제공한 바비즌의 존재 가치를 보자고 말한다.

“바비즌은 20세기 대부분 기간 여자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곳,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자기 삶을 계획하고 설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호텔은 여자들을 자유롭게 했다. 여자들이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하게 여겨졌을지라도 꿈의 도시에서는 상상하고 실현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야망을 발산하고 욕구를 추구하게 했던 것이다.”

<호텔 바비즌> 니케북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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