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파산시키면서 지구 구하지않겠다”…이 나라 변심 일리있네

권한울 기자(hanfence@mk.co.kr), 신윤재 기자(shishis111@mk.co.kr) 2023. 9. 2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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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가·고금리에 경제 몸살
총선 앞두고 지지율 끌어올리기
정계·車업계 찬반 엇갈려
‘전기차 전환 연기’ 발표하는 英총리 [로이터 = 연합뉴스]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당내 반발에도 탄소중립(넷 제로) 정책에 제동을 건 것은 영국 국민들의 가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20일(현지시간) 수낵 총리는 휘발유·경유차 신차 판매 금지 시기를 2030년에서 2035년으로 5년 연기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전기차(EV)가격이 높은 점 등 현실적 이유를 들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산업계의 지지를 얻으면서 보다 현실적인 방법으로 넷 제로를 목표로 하겠다”면서 “가정에 5000파운드, 1만파운드 등 불필요한 청구서를 부과하지 않고 실용적인 접근 방식으로도 2050년 넷 제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앞서 보리스 존슨 총리가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가정용 난방기를 퇴출시키고 히트펌프 보일러를 놓도록 장려한 것이 가정에서는 불필요한 비용으로 인식됐다는 얘기다.

또 2030년까지 7년밖에 남지 않은 현시점에서 내연기관차를 퇴출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산업계의 불만도 많았다. 휘발유 경유차 판매 비중이 큰 일부 자동차 업계는 “준비기간이 너무 짧다”며 판매 금지 시기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수낵 총리는 주택 가스보일러를 단계적으로 없애는 계획을 완화하고, 신규 석유보일러 설치 금지 시기도 2026년에서 2035년으로 연기했다. 카풀장려책·쓰레기 7개 분리 재활용안·육류 소비 축소안 등도 취소했다. 국민들의 현실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게 정책폐기의 이유였다.

실제 영국 국민들은 높은 물가와 고금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영국 싱크탱크 레졸루션재단 최근 영국의 생활수준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 이후 최악일 것이라는 의 연구 결과가 나올 정도로 심각하다. 설상가상 올 초 물가상승률이 10%까지 치솟았고, 고물가를 잡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5%대까지 끌어올리면서 가계 가처분소득이 줄고 생활고가 가중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이 같은 현실을 인식한듯 수낵 총리는 “현재의 프로그램은 어려운 영국 가계에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부과할 것이며, 결국 기후 변화 대응에 대한 국가적 합의마저 붕괴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넷 제로 정책 전환은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정치적 포석으로도 해석된다. 골드만삭스 출신의 ‘실용적 경제전문가’로 영국 경제를 살릴 것으로 기대됐던 리시 수낵 총리가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 초 영국 일간 옵서버가 여론조사기관 오피니움과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수낵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지지율은 28%로, 야당인 노동당 지지율(42%)에 14%포인트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수낵 총리의 넷 제로 정책 전환에 때해 21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는 “총선을 앞두고 산업계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는 가계부담을 완화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영국의 차기 총선은 2025년 1월 열릴 예정이지만 지지율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집권 보수당은 내년 10월 또는 11월 조기총선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통신은 수낵 총리가 기후변화 대응 속도를 늦추면 총선에서 부동층을 잡을 수 있다고 본것 같다고 분석했다.

수낵 총리는 보리스 존슨 전 총리를 겨냥해 “모든 정부의 정치인들은 비용과 장단점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다”면서 “당시 (정부의 정책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후변화 대응 속도를 너무 빠르게 설정해놨고, 이대로라면 반발로 인해 목표를 이룰 수 없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연기된 휘발유·경유차 신차 판매 금지 시기인 2035년은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연합(EU) 국가들과 미국 캘리포니아와 같은 일정이다. 일본 역시 2035년 판매 금지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하이브리드차 판매는 허용할 방침이다.

다만 수낵 총리는 이번 연기 조치가 기후변화 정책을 물타기하는 것은 아니며 두바이에서 개최되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도 참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2050년 넷제로 목표도 유지했다.

영국은 처음으로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법적 구속력이 있게 만든 나라로, 특히 존슨 전 정부는 2020년 이후 전세계 탈탄소 선도국을 자임해왔다. 닛케이는 주요국의 환경 규제를 이끌어온 영국의 정책 변경이 전세계 탈탄소 흐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많은 보수당 의원들과 일부 자동차 업계는 정책 전환을 환영했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수엘라 브레이버먼 영국 내무장관은 “우리는 영국 국민을 파산시켜서 지구를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요타도 수낵 총리의 결정을 환영했다. FT는 “도요타는 전기 자동차를 구입할 수 없거나 충전이 어려운 지역에 사는 소비자는 하이브리드 기술이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고 전했다.

다만 EV 전환을 서둘러 온 자동차 업계는 영국 정책 전환에 따른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기아차는 성명에서 영국 정부의 이번 조치가 자동차 업계와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공급망을 방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영국 제조업체를 대표하는 무역단체 메이크유케이(Make UK)는 “정부의 탄소중립 목표치를 낮추는 것은 투자를 위해 안정성과 신뢰가 필요한 제조업계에게 큰 좌절”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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