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왈의 아트톡] 음악가의 ‘판박이 프로필’ 유감

기자 2023. 9. 2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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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프로그램에 적힌 음악가들의 프로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재미있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며칠 전 어느 연주회의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런 경험을 다시 하고는 빙긋이 웃고 말았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뭐, 이건 관습이야! 웃고 넘기자고.”

혼자 그렇게 웃고 넘기려다 뭐라도 좀 고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 몇 자 적어보기로 했다. 괜한 ‘지적질’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공연 프로그램이나 보도자료에 있는 음악가 프로필의 ‘일반적인 공통점’에 관한 이야기다. 공연 관람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전에 프로그램을 읽던 기억을 더듬어 보고, 앞으로 공연을 보게 될 사람들은 음악회 프로그램에 소개된 출연자들의 프로필을 유심히 살피길 바란다. 내 말이 적어도 억지로 보이지는 않을 테니.

첫째, 중·고등학교 졸업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무슨 학교나 무슨 예고 졸업부터 프로필을 시작하는 경우가 적잖다. 다른 분야에서는 대학이나 최종 학력을 기술하는 게 일반적인데, 음악가들의 세계에서는 중졸 이력부터 넣는 것이 낯설지 않다. 어릴 적부터 재능을 연마하는 장르 특성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선지 요샌 어느 영재아카데미 출신임을 드러낸 경우도 종종 본다.

둘째, 수석이나 1등 졸업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중·고등학교 졸업 때는 물론, 대학교나 대학원, 외국 어느 음악원(콘서바토리)의 무슨 무슨 과정에서 수석 혹은 차석을 했다는 사실이 두세 개는 반드시 들어가 있다. 익히 알려진 세계적 콩쿠르가 아니더라도 별별 콩쿠르의 입상 경력도 빠지지 않는다. “음악가 중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정말 많구나!” 이런 생각이 들게끔. 어느 단체와의 무수한 협연도 빠뜨릴 수 없는 경력이다.

셋째, 연대기적으로 오랜 경력을 쭉 열거하다 보니 프로필이 무척 길다는 점이다. 공연 현장 경험이 꽤 풍부한 나도 이런 장문의 프로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도중에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설령 완독했다고 해도 머리에 담긴 인상적인 내용은 별로 없다. 하물며 음악회 문화에 덜 익숙한 관객이라면 오죽할까 싶다.

넷째, 이러니 정작 돋보여야 할 경력은 묻힌다는 점이다. 몇해 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계적인 성악콩쿠르에서 우승한 소프라노 A씨. 예고 졸업부터 대학교수인 현직까지 9단계로 기술된 프로필에서, 그 콩쿠르 우승은 ‘10개가 넘는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입상’ 중의 하나로 적혀 있다.

A씨는 본인의 경력에서 내용보다 메달 개수가 더 중요하다고 본 것 같다. 그 유명 콩쿠르 우승 소식을 대서특필한 언론의 감각은 이쯤에서 무색해진다.

왜 음악계에 이런 관습이 굳어졌을까. 너무 오래된 익숙함이라 들춰내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좀 고치면 음악가 자신들에게도 좋고 관객들에게 편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니 귀담아들으면 좋겠다. 흔한 말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서라도.

저런 프로필이 마치 ‘공통양식’으로 굳어진 건 아마도 클래식 음악(계)에 깔린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재능은 기본, 그 바탕에 어릴 적부터 고난도 기술을 연마하면서 ‘나는 다르다’는 의식이 자리 잡아 소소한 이력도 놓치기 아까운 건 아닐까. 게다가 단계별 치열한 경쟁을 거쳐 ‘살아남은 자’라는 우월감도 있겠고.

그런데 이런 내력은 ‘그(음악)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할지 몰라도 관객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관객은 평면적으로 엮인 연대기보다는 짧더라도 입체적인 서사에 주목한다. 시시콜콜한 내력은 그 감동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감미료면 된다. 감동적인 서사의 시작은 그가 선 무대여야 한다.

내게 굉장히 좋아하는 목소리 A씨의 프로필을 쓰라면 이렇게 쓰겠다.

‘소프라노 A/ 벨기에 Q 국제콩쿠르 성악 부문 우승/ 현 ○○대학교 성악과 교수/ ○○대학교 졸업/ 오페라 <○○○> 등에서 주역/ 음악적인 강점(필요하면 몇 개 더 추가, 중요한 순서에 따라).

이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다음 감동은 무대의 몫이다.

정재왈 예술경영가서울사이버대 교수

정재왈 예술경영가서울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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