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당연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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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2년을 채운 지금, 창피하고 민망한 순간을 꼽자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많은 경우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반문을 들을 때다.
휴대전화 건너편에서, 때론 얼굴을 맞대고 '기자가 그런 것도 모르고 질문하냐'는 투의 면박을 당할 때면 '내가 너무 무식했구나'라는 자기반성이 '모르니까 질문하는 거지!'라는 정신승리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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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박지영
이슈팀 기자
“당연한 걸 왜 물어봐요?”
기자 생활 2년을 채운 지금, 창피하고 민망한 순간을 꼽자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많은 경우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반문을 들을 때다. 휴대전화 건너편에서, 때론 얼굴을 맞대고 ‘기자가 그런 것도 모르고 질문하냐’는 투의 면박을 당할 때면 ‘내가 너무 무식했구나’라는 자기반성이 ‘모르니까 질문하는 거지!’라는 정신승리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곤 했다. 얼굴 붉히며 부끄러워하다 몰랐던 걸 알아가는 이 모든 경험이 ‘기자가 돼 가는’ 과정이라 여겼다.
당연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자연스레 누리지만 누군가에게는 멀기만 한 ‘씻을 권리’ 기획을 진행하면서였다. 일하면서 혹은 집에 머물며 제대로 씻을 공간이 있는지, 씻기 위해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씻지 못해 어떤 고충을 겪는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씻는 행위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물 나오는 곳은 정수기밖에 없는 휴게공간에서 물티슈로 겨우 땀을 닦아내는 청소노동자, 누군가의 도움 없인 화장실을 찾기조차 버거운 중증장애인, 샤워는커녕 용변 보는 일도 버거운 건설 현장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씻을 수 있냐’는 물음은 당연한 질문이 아니었다. ‘씻을 권리’ 기획을 하며 만났던 많은 이들은 지금까지 누가 물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도중에 끼어들기 힘들 정도로 제대로 씻지 못하며 겪은 어려움과 서러움, 분노를 절절하게 토해냈다.
당연한 대답도 있었다. ‘하청업체 청소노동자 휴게공간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없다는 걸 알고 있냐’는 물음에 서울시 한 구청 관계자는 “그럴 리 없다. 업체가 당연히 마련해 놓은 거로 알고 있다”며 “관리, 감독도 1년에 두번이나 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장애인’ 목욕탕이 성별을 나눠 일주일에 단 이틀만 운영되고, 휠체어 리프트나 목욕을 지원하는 인력이 없는 걸 두고 한 시설 관계자는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며 답했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반문을 들었을 때 당황스러움 이상으로, 현장과 동떨어진 탁상행정을 접할 때의 황당함은 말문이 막히도록 했다.
지난달 씻을 공간이 열악한 청소노동자의 현실을 담은 기획기사가 나가고 하루 뒤 해당 구청 담당 직원들이 기사에 나온 하청업체 소속 청소노동자들의 휴게공간을 찾았다. 서울시는 보도 6일 만인 지난달 23일 25개 자치구에 “대행업체 환경공무관 휴게실은 직영 휴게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간 부족 및 낮은 접근성, 휴게실 내 위생시설(화장실, 샤워시설, 세탁실)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휴게실 개선을 위한 내년도 자체 예산편성 및 운영실태 점검을 강화하는 등 환경공무관의 근무환경이 개선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란다”는 공문을 보냈다. ‘이제서야 신경 쓰겠다’는 뒷북 행정에 씁쓸함보다도 ‘이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며칠 전 늦은 밤 이태원 해방촌에서 친구들과 저녁 자리를 마치고 나선 길거리에서 취재원으로 만났던 청소노동자분들을 먼발치에서 다시 보게 됐다. 취재 때와 마찬가지로 좁은 골목에 놓인 쓰레기봉투를 허리 굽혀 줍고 있는 모습이었다. 평소 당연하고 익숙했던 해방촌 골목 분위기가 그날만큼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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