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오펜하이머'와 인재유출
전 세계 과학기술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배경 중 하나를 꼽자면 독일 히틀러의 등장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 주인공이 1925년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영국과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데 당시만 해도 미국의 과학 수준은 유럽에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이것이 뒤집힌 계기가 1930년대 히틀러의 집권기였다. 그 전부터 나치의 반유대적 행보를 간파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유수 과학자들은 서둘러 미국으로 피신했다. 미국 대학과 연구소에 정착한 이들은 유럽 전역을 장악한 독일 나치로부터 과학 인재들을 미국으로 끌어들였다. 대다수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될지 모를 유대인들이었다. 예컨대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존 폰 노이만, 양자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 세계 최초 원자로를 만든 엔리코 페르미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미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과 오펜하이머의 지도력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폭탄을 개발해냈다. 여기엔 노벨상 수상자만 10명 넘게 데려올 정도의 인재 유치 노력과 함께 현재 가치로 200억달러(약 26조원)가 넘는 거액의 투자가 있었다.
반면 독일은 오토 한이 핵분열 원리를 세계 최초로 발견할 만큼 깊은 과학지식을 갖고도 원자무기 개발을 시도조차 못했다. 막스 플랑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처럼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이 도망치지 못한 채 남아 있었지만 이들은 신체와 연구의 자유를 제약당해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인재 유출이 국가 명운을 가를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셈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사를 다룬 '휘어진 시대'의 저자 남영 교수는 "히틀러의 탄압으로 미국은 독일을 포함한 유럽 내 유대인 인재들을 쓸어 담았다"며 "2차 대전 후 미국이 최강국이 된 데에는 히틀러가 과학자들을 내팽개쳤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우리나라도 최근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축소 문제로 시끄럽다. 취지와 명분을 떠나 자칫 우수한 인재를 잃거나 사기를 꺾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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