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난맥상]③ ’필요악’ 서면결의서, ‘게임 끝’ 총회, ‘막강 권한’ 조합장... 재건축 신뢰·투명성 깎아먹는다

이미호 기자 2023. 9. 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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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회, 용역업체 선정하고 자체 심의 ‘모순’
조합장, 변호인·회계사 상대하는데... 현실은 “전문성 바닥”
전문가들 “법정 교육 이수 의무화 ... 공부하는 시스템” 절실

이른바 ‘착한’ 재건축·재개발은 없을까. 도시정비사업은 정비구역 지정, 조합 설립 인가, 사업인가, 시공사 선정 및 착공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과 업무대행사, 시공사는 물론, 조합원간 ‘이권 다툼’이 자주 발생한다. 사업 지연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 몫이 된다. 분쟁을 줄이고 속도를 높이는 방법은 없을까. 재건축·재개발의 현주소를 살펴본다.[편집자주]

서울 시내 아파트의 모습/연합뉴스
총회 의장(조합장) : “제5호 안건인 ‘사업부지 주변 하수관리 정밀안전진단 용역 업체 선정 및 수의계약 체결의 건’ 심의를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제안사유 보고드리겠습니다. (중략) 이에 대한 용역 수행이 필요한 바, 3개 업체에 대해 견적서를 받았고, 아래 표와 같이 최저가로 협의된 △△△를 선정하고 수의계약을 체결하고자 의결을 구합니다. 질의 사항이 없으므로 심의를 종결합니다.”(의사봉 ‘땅땅땅’)

서울 강남권에 소재한 A아파트 재건축 조합 대의원회의 현장 모습이다. 조선비즈가 확보한 해당 아파트의 ‘제00차 대의원회’ 속기록을 보면 하수관로 안전진단 용역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런데 더 자세한 내용을 요구하거나 의문을 제기를 하는 대의원은 보이질 않는다. ‘의결을 구했다’가 ‘심의를 종결’하기까지 과연 몇 초나 걸렸을까.

이들이 ‘초 단위’ 가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서면결의서(의사표시를 서면으로 대신 밝힘)를 통해 과반수 이상 찬성을 확보해 놨기 때문이다.즉 누군가 아무리 떠들고 반대해도 애초 ‘끝난 게임’이었다. 이런 현상이 비단 이곳만의 문제일까? 그렇다면 서면결의서 역시, 과연 조합원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했다고 할 수 있을까?

◇ 용역업체 선정·심의 ‘할 거 다하는’ 대의원회

정비 사업 호흡이 과거보다 한층 빨라지면서 보다 투명하고 체계적인 사업 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향후 40년간 서울 도심은 ‘정비 사업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장기적 호흡으로 조합 임원의 자격을 강화하고 운영 방식을 개선해 조합원들의 진정한 의사가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21일 정치권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7월 18일 공포·시행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시정비법) 개정안은 조합임원의 자격요건과 결격사유를 강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특히 시공자 선정을 위한 총회는 반드시 조합원 과반수 이상이 직접 출석하도록 하는 내용을 신설(제45조) 했다. ‘집합적 의사결정’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취지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여전히 대의원회가 중요한 사항들을 ‘임의로 결정’할 소지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주요 정비 사업장에서 조합장이 개인적 비리 및 비위 행위를 저지르거나, 조합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거나, 조합원들의 이해관계에 배치되는 ‘독단적 결정’을 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이에 불필요한 분쟁이 발생하거나 사업 지연이 초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지난 2021년 신반포3차·경남통합재건축(現 래미안원베일리) 사업장에서 독일 프로파인(Profine) 사(社) 창호 시공 문제를 놓고 조합과 조합원들이 부딪혔다. 일부 조합원 측은 창호 교체 등 설계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조합 측은 공사가 중단되면 비용이 100억원가량 늘고 입주도 지연된다며 반대했다. 결국 안건은 부결됐지만, 여전히 주택 평형과 상관없이 거실 창호가 3.6m로 설계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서울의 한 재건축 단지에서 비대위원 활동을 해 온 B씨는 “재개발·재건축조합에서 발생하는 굵직한 비리는 사업시행계획 단계에서 발생한다. 사소하게는 창호 등 대부분 용역 계약이 이때 이뤄지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그 계약이 실질적으로 임원들에 의해 임의로 선정된다”라고 지적했다.

조합장과 임원들이 참석하는 대의원회는 총회의 의결사항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 외에는 총회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다(도시정비법 제46조 4항). 의결 대상이 되는 항목은 동법 45조에 규정돼 있는데, ‘예산으로 정한 사항 외에 조합원에게 부담이 되는 계약’(4호)역시 대상이 된다. 심의 의무가 있는 대의원회가 스스로 업체를 선정하고 계약조건까지 설정할 권한을 갖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B씨는 “현행 도시정비법은 대의원회 제도에 대해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이들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면서 “특히 사전서면결의서는 대의원회의 심의 의무와 모순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의원들의 책임을 명시하고 강화하며 실질화하는 방향으로 입법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만 대의원 책임이 강화되면, 적극 나서는 사람이 없어 조합 결성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신탁 방식이나 전문조합 관리인 제도가 대안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신탁 방식은 수수료가 크다는 단점이 있고, 외부에서 조합장을 데려다 쓰는 것은 국내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일각에선 서면결의서가 분명히 한계는 있지만 모든 조합원들이 직접 참석해 의견을 반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필요악’과 같은 존재라는 분석도 나온다. 도시정비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원칙대로라면 당연히 총회를 통해 모든 안건이 결정돼야 한다. 하지만 조합원이 1000명이라고 일단 가정해 보자. 민주적 결정이라는 게 실질적으로 가능하겠냐. (대의원회는) 논의가 가능하되, 민주적인 대표성을 상실하지 않은 정도의 숫자로, 총회에 준하는, 의결기관을 하나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현실적으로 판단했을 때 경쟁 입찰을 하도록 하는 등 다른 쪽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 소재 한 조합 총회에 조합원들이 참석하고 있는 모습.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은 없음/뉴스1

◇ 재건축 시장 교란하는 조합장들... ‘법정 교육’ 절실

업계에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조합장이 제대로 역할만 해줘도 대의원회가 자정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합장은 중요한 정보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고 사실상 조합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사회 의장이며, 대의원회 의장이고, 총회의 의장이다. 단독으로 총회를 소집할 권한이 있다.

특히 각종 용역업체 선정부터 시공사 선정, 아파트 건축시 자재 선택까지 수많은 이권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관련 업체들의 ‘로비 유혹’에 빠지기 쉽다.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공사비 인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특정 업체에 뒷돈을 받거나 특정 자재를 선정하는 쪽으로 힘을 쓰다 보면 결국 구속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작년 7월, 경남에서는 한 조합장이 상대 후보에게 사퇴하면 2억원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한 철거업체 대표로부터 공사 수주 명목으로 1억900만 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고액 연봉은 물론, 인센티브를 받는 경우도 있다. 조합장이 받는 업계 평균 연봉은 (1000가구 기준) 8000만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기를 단축하거나 공사비를 줄이는 등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기도 한다. 다만 과도한 인센티브는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

과거 한 재건축 사업장의 대의원회는 조합 해산 시 발생한 추가 이익금의 20%를 인센티브 명목으로 조합장과 임원들에게 지급하는 내용을 가결했다가 (일부 조합원들로부터) 무효확인 소송을 당했는데, 2020년 3월 9일 대법원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를 벗어난 인센티브 지급”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조합장이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갖고, 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법정 교육 이수’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도시정비사업 전문가 과정을 이끌고 있는 김덕기 건국대학교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조합장은 권한에 비해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너무 떨어진다”면서 “조합의 협력업체만 봐도 시공사, 변호사, 법무사, 감정평가사, 세무사, 회계사, 건축사, 도시계획기술사 등 전문가들인데 이들을 제대로 부리기는커녕 오히려 이용만 당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토교통부 또는 서울시 등 지자체 주관으로 일정 기간 동안 교육을 받도록 법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소유자여서, 또 총회에서 다수표를 받아서 조합장이 됐으니 이젠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라며 “공부하지 않으면 조합장이 될 수 없고 노력하지 않으면 조합장이 될 수 없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했다.

정비 사업에 오랫동안 종사한 한 관계자는 “조합장이 자기 무용담을 가지고 시장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공무원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인데 정규 의무 교육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법제화시켜야 한다. 하다못해 공인중개사도 교육을 이수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냐”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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