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빠삭한 우리, 무서울 때 함께 걸으면 든든하죠”

김세훈 기자 2023. 9. 2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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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주민이 지킨다’
고덕1동 여성자율방범대
고덕1동 여성자율방범대원들이 지난 14일 고덕파출소에 모여 순찰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지난 14일 오후 7시30분 무렵 서울 강동구 고덕파출소에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모였다. 등에 ‘순찰’이라고 적힌 형광조끼를 입고 한 손에는 야광봉을 든 채였다. 이들은 경찰과 야간 합동 순찰을 위해 모인 고덕1동 여성자율방범대원이다. 지난달 관악구 등산로 살인 사건 이후 고덕 여성자율방범대는 부쩍 바빠졌다. 주 2회 1~2시간 동네를 돈다. 동네 야산을 순찰하는 빈도도 늘었다.

고덕 여성자율방범대는 2013년 창설된 ‘립스틱순찰대’가 시초다. 일대 재건축으로 우범지대가 많아진다는 우려를 누그러뜨리려 만들었다. 다른 자율방범대와 달리 총 24명 남짓한 구성원 모두 여성이다. 초대 자율방범대장을 맡은 김종순씨(64)가 지금껏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김씨는 “서로 단합이 정말 잘된다. 뭔가를 시킨다는 개념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맞춰가는 느낌이라 초창기 멤버들 대부분이 이탈하지 않고 지금까지 쭉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원들의 가입 경위는 다양했다. 코딩 시간강사 김은영씨(46)는 지난해 11월 방범대에 가입해 총무로 일하고 있다. 방범대 막내 축에 속한다. 그는 ‘동네 지킴이’가 여아 납치를 막았다는 뉴스를 보고 ‘치안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활동을 시작했다. 김씨는 “밤늦게 혼자 다니기에는 위험해 보이는 길들이 있다.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무섭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건봉자씨(70)는 최고령 방범대원이다. 평소 수영·요가를 꾸준히 해온 덕에 또래보다 건강하다고 자부한다. 30년간 해온 장사를 접고 몸을 움직일 일을 찾다 방범대에 가입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순찰에 참여한다. 아이들은 건씨를 ‘할머니 경찰관’이라고 부른다. 건씨는 “고덕산은 내가 30년째 다니는 산이라 훤히 꿰고 있다. 나와서 순찰을 하면 운동도 되니 건강이 될 때까지 하고 싶다”고 했다. 주택가를 10분쯤 걷자 산길 입구가 보였다. 낮이라면 산책하듯 걷는 완만한 길이지만 밤에는 어두워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야 했다.

예술 작업을 1년여간 쉬다가 자율방범 활동을 시작한 오연옥씨(64)는 “그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했지만 남을 위한 활동은 별로 하지 않았다. 순찰을 돌다 보면 사람도 많이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흉기난동 이후 길을 걷다가도 앞뒤로 사람이 있는지 살피게 된다. 범죄 예방에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순찰을 한다”고 했다.

산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 주택가에 숨어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들이 주된 계도 대상이다. 여성화장실에 숨어 있던 남성을 붙잡아 경찰에 넘긴 적도 있다. 2016년에는 서울경찰청이 주관하는 베스트 자율방범대상을 받았다. 올해는 법정단체로 인정받았다. 김종순씨는 “지역 주민들이다 보니 골목 곳곳을 경찰보다 빠삭하게 아는 경우도 많다. 동네를 지킨다는 자긍심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김종순씨는 “자율방범 활동은 여성들이 약하다는 편견을 깨는 데도 도움이 된다”며 “어떤 사람들은 여성을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 마음대로 제압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긴다. 여성은 늘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민들을 돕고 지킬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리고 싶다”고 했다.

김세훈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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