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대비는 방파제보다 ‘의견 수렴’[기후위기적응 해외는, 지금]

김기범 기자 2023. 9. 2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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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맨해튼 ESCR 프로젝트
미국 뉴욕 맨해튼 동부 ESCR 프로젝트(East Side Costal Resiliency·동부 해안가 복원력) 현장의 모습. 공원과 주택가 사이 방파제를 제외하면 여느 강변 공원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김기범 기자

미국 뉴욕 맨해튼 동부, 대서양과 가까운 로워 맨해튼의 강변은 멀리 공사를 위해 통제한 구역을 제외하면 여느 강변 공원과 다를 바 없었다. 해수면 상승과 허리케인을 대비해 쌓은 높이 5m의 방파제는 공원과 도로, 주택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택가와 해안 사이를 막고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일반적인 공원의 담인 양 ‘티’를 내지 않았다.

지난 6일 뉴욕 맨해튼 동쪽 대서양 연안(맨해튼 로워 이스트사이드)에서 만난 톰 폴리 뉴욕시 설계건설부 위원은 “홍수로부터 도시를 지키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공원을 건설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며 “뉴욕시 입장에서는 단순히 방파제를 세우기만 하면 편했겠지만 시민들이 해안 공원을 편히 드나들면서 누릴 수 있도록 현재와 같은 디자인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뉴욕시가 맨해튼 로워 이스트 사이드에 길이 4㎞, 높이 5미터의 방파제와 공원 등을 조성 중인 ESCR 프로젝트(East Side Costal Resiliency·동부 해안가 복원력) 현장에서 지난 6일 톰 폴리 뉴욕시 설계건설부 위원(오른쪽)과 조셉 리온 해안회복력건설부 부위원이 대화하고 있다. 김기범 기자

폴리 위원의 말처럼 뉴욕시가 맨해튼 로워 이스트사이드에서 진행 중인 ESCR(East Side Costal Resiliency·동부 해안가 복원력) 프로젝트 건설 현장에서는 뉴욕시의 기후위기 적응에 대한 고민과 주민들의 참여 의지가 충돌하고, 타협했다. 기후 재난을 막기 위해 거대한 시설을 조성할 때 정부나 지자체 독단이 아닌 주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면서 만들어야만 재난 대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뉴욕시는 2012년 미국에 큰 피해를 준 허리케인 샌디를 계기로 ESCR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당시 뉴욕에서만 44명이 사망했고 재산피해는 190억달러(약 22조5000억원)에 이르렀다. 침수로 뉴욕 지하철은 나흘 동안 운행이 중단됐고 뉴욕증권거래소는 1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이틀 연속 휴장했다. 해수면은 평상시보다 240㎝가량 상승했다.

뉴욕시는 2021년 허리케인과 해수면 상승 등으로 인한 도시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맨해튼 로워 이스트사이드에 14억5000만달러(약 1조9285억원)을 들여 길이 4㎞, 높이 5m의 방파제를 2026년까지 쌓겠다고 발표했다. 공원 지하에 침수를 막기 위한 빗물 저장고도 조성하기로 했다. 높이 5m는 100년 빈도의 강력한 허리케인을 기준으로 결정했다.

미국 뉴욕시가 맨해튼 로워 이스트 사이드에서 진행 중인 ESCR 프로젝트(East Side Costal Resiliency·동부 해안가 복원력)의 조감도. 뉴욕시 제공.

거대한 방파제만으로 허리케인,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방파제가 도시 경관을 망치는 흉물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사실 뉴욕시는 이 같은 계획을 발표하기 10년 전부터 주민 의견 수렴과 반발, 이에 따른 설계 수정, 새로운 설계안에 대한 주민 의견 제시와 계획 수정 등 지난한 절차를 거쳤다. 주민 공청회만 70여차례 열렸다.

해당 지역 주민 모두가 이 같은 과정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특히 기존의 공원과 나무를 베어낸 뒤 새로 공원을 조성하는 것에 반발이 컸다. 2018년 빌 드 블라지오 뉴욕 시장이 새로운 설계안을 발표하면서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 이전까지 주민 의견을 반영해 만들어놓은 디자인의 상당 부분을 바꿨기 때문이다. 일시적이지만 기존 공원이 사라진다는 것에 반발해 블로그에 “RIP(Rest in peace·추모의 의미를 담은 약자) 이스트 리버 파크”라는 글을 올리는 주민들도 있었다.

주민들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해당 지역에 사는 백인 중산층은 크게 반발했고 유색인종들은 오래된 공원을 새로운 공원으로 대체하겠다는 뉴욕시 결정을 대체로 반겼다.

미국 뉴욕시가 맨해튼 로워 이스트 사이드에서 진행 중인 ESCR 프로젝트(East Side Costal Resiliency·동부 해안가 복원력) 현장. 오른쪽의 숫자 13이 쓰여있는 미닫이식의 철문은 수위가 올라가면 닫고, 다시 수위가 내려가면 열 수 있는 방식으로 운용될 예정이다. 김기범 기자.

2018년 뉴욕시의 계획 수정 이후 진행된 공청회에서는 주민들의 날 선 반대 의견이 나왔고, 시위 등 직접행동에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뉴욕시는 공원 전체를 폐쇄하려던 애초 계획을 수정해 주민 의견을 일정 부분 받아들였다. 공원 일부를 폐쇄하고 공사를 진행한 뒤, 해당 부분이 완료된 뒤 공원의 다른 부분을 공사하기로 했다. 해안가에 있던 주민 주도의 에코센터를 폐쇄하려던 계획도 백지화했다. 덕분에 뉴욕시가 애초에 내놓은 원안과 비교해 재난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폴리 위원은 “뉴욕 시민 중 12만5000명의 안전을 위한 프로젝트이다 보니 반대 의견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기존에 심겨 있던 나무를 베어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많이 나왔는데 사실 많은 나무가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대신해 수해에 더 강한 나무를 심고,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한 공원을 제공하려 애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의견 수렴 과정을 통해 ESCR 프로젝트는 공사 중에도 주민들이 공원을 이용할 수 있는 사업으로 바뀌었다.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원과 주택가 사이 방파제 곳곳에 거대한 미닫이 철문을 설치해 접근성을 높였다. 이 철문은 평상시에는 열려 있다가 해수면 상승과 침수가 예상되면 닫히는 식으로 운용될 예정이다.

뉴욕은 ESCR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빗물 저장을 통해 도시 침수를 막는 하이라인 역시 십수 년에 걸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조성했다. 하이라인을 모델로 삼은 한국의 서울로7017이 1년 만에 서울시 안대로만 조성된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하이라인은 폐선된 고가철도를 698종에 달하는 식물이 자라는 도심 속 산책로로 탈바꿈시킨 곳으로, 뉴욕시가 아닌 시민단체 ‘하이라인친구‘들이 운영을 맡고 있다.

뉴욕시는 다양한 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뉴욕에 거주하는 것을 고려해 ESCR 프로젝트 내용을 홈페이지에서 133개 언어로 제공한다. 폴리 위원은 “주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담당자들을 통해 주민들에게 현재 이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과 추후 계획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오미 실러 미국 뉴욕시립대 인류학과 부교수. Dan Fethke 제공.
“기록과 교육, 감시가 시민들이 기후위기에 맞서는 방법”

“(방파제 자체보다) 이런 구조물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하고, 교육하는 과정이 더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측면일 것입니다.”

미국 뉴욕시의 ESCR(East Side Costal Resiliency·동부 해안가 복원력) 프로젝트를 연구해 온 나오미 실러 뉴욕시립대 인류학과 교수는 지난 19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방파제 같은 거대 구조물만으로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면서 “이런 구조물을 만드는 과정의 사회적 갈등을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미래 세대에게 교육하는 과정이야말로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본질적인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러 교수는 ESCR 프로젝트 대상 지역인 로어맨해튼에 거주하고 있다.
실러 교수는 “뉴욕시는 방파제의 높이가 2100년까지 허리케인과 해수면 상승에 대비했다고 하지만 기후변화는 인류가 예상하는 속도를 뛰어넘어 점점 가속화하고 있다”면서 “거대 구조물만으로 기후위기에 대처하려는 것은 바로 눈앞의 상황만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ESCR 프로젝트로 조성되는 공원을 환경교육의 장으로 삼는다면 미래세대가 기후위기에 대해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대처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러 교수는 뉴욕시가 ESCR 프로젝트에 시민 의견 일부만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방파제로 물을 아예 차단하는 방식이 아닌 물이 자연스럽게 범람하고, 이를 공원이 흡수하는 방식이 더 지속 가능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에서도 하천이나 바다의 범람을 둑이나 방파제로 막아내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실러 교수는 행정기관이 기후재난에 대비해 벌이는 토목공사에 시민 감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이스트리버얼라이언스라는 주민 모임에서 뉴욕시가 구간별로 나눠 공원을 일부 개방하는 식으로 공사를 차례대로 진행하는지 등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있다”며 “뉴욕시가 하는 대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공사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한 약속을 잘 지키는지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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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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