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장의사요?”…국군 유해 발굴이 거절당했다 [본헌터㉖]
2000년 다부동 전투지역서 50년만에 첫삽, 그 의미를 묻다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장의사요?”
계획서를 보던 선주가 물었다. 중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서에는 형질인류학자(체질인류학자) 1명과 장의사 2명으로 팀을 구성해 유해발굴을 추진한다는 초안이 작성돼 있었다. 2000년 2월의 일이다. 두달 전 겨울방학을 맞아 부인 두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던 선주는 한국에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국전쟁 50돌을 맞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을 한다고 했다. 적임자를 찾기 위해 여러 사람을 수소문하다 미국에 있는 선주에게까지 연락을 취한 것이다. 두 달 뒤 한국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렇게 하여 육군본부 제대군인과 실무자를 만났다.
육군본부에서는 선주를 만나기 전 한 고고학회에도 의사를 타진했던 모양이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장의사냐”고 하면서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학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온 답변 같았다. 그렇다면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을 장의사가 맡아 하는 건 적합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장의사는 염을 하고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이다.
1999년 12월 미국에서 국제전화로 이 일을 제안받았을 때 선주는 당연히 끌렸다. 막연한 애국심의 발로는 아니었다. 인류학자로서 당연히 호기심이 당기는 일이었다. 특정 시기, 특정 집단의 사람을 연구할 좋은 기회였다. 유골과 유품을 통해 당시 사회와 문화와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었다. 학문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선주는 육군 제대군인과의 실무자에게 발굴단 구성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국군 유해발굴은 국가 차원에서도 상징적 의미가 있는 사업이니만큼 문화재 발굴 수준으로 격을 높여야 한다는 취지였다. 관련 전문가로 발굴단을 구성하고 자문위원단도 꾸리자고 제안했다. 인류학자 1명과 장의사 2명으로 구성한다는 초기 계획안은 폐기되었다. 대신 의대 해부학과 교수, 법치의학 전문가, 유전자 전공 교수, 군사학 전문가, 고고학자 등이 참여하도록 했다. 유해전문발굴 조사는 선주가 책임을 지기로 하고, 체질인류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3명이 조사보조원으로 참여했다.
3년 기한이었다. 육군 유해발굴단은 증언자와 전사(戰史) 등을 통해 유해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큰 지점들을 추리는 한편 전국 각 부대에 공문을 보내 인근 후보지 추천을 요청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2000년 4월 첫 발굴지가 된 곳은 경북 칠곡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옛 낙동강 전선 지역이었다. 발굴단은 칠곡 다부동의 다부동전적기념비 앞에 천막을 쳤다. 이곳은 1950년 8월1일부터 9월16일까지 국군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의 공세를 저지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투 중 아군 1만여명과 적군 1만7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매일 현장 관할 대대에서 사단장의 책임 아래 50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발굴을 시작하기 전 현장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사람의 각 부위별 뼈가 어떻게 생겼고, 뼈가 나오면 어떻게 조처해야 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무슨 뼈가 나오겠냐”는 비관론이 무색할 정도로 첫 발굴지역에서부터 뼛조각이 나왔다. 첫해인 2000년 4~5월에 칠곡 다부동과 안강·기계, 서울 개화산 지역을, 9~10월에는 강원도 화천 마현리와 양구 지역을 조사했다.
봄과 여름의 발굴성과는 군 수뇌부를 고무시켰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형보도 관심을 보이면서, 2000년 가을부터는 의학, 치학, 사학, 고고학 등을 공부하다 입대한 10명의 전문 병력들을 발굴병으로 뽑았다. 선주는 이들을 충북대 인근 부대에서 10일간 집중훈련시킨 뒤 현장 최일선에 투입했다. 이들은 이후 2007년 1월에 창설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모태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 하는 유해발굴이었다. 1950년대에 사용한 유품과 무기들을 알 수 없었다. 국군정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 요원이 와서 장비 감식을 해주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병들이 현장에 와서 출토된 무기들을 살펴보고 설명해주기도 했다. 피아 식별도 필요했다. 신발 조각이나 모자 또는 각종 의복의 표식 등을 보고 국군 것인지 북한군 것인지, 아니면 미군 또는 중공군(중국군) 것인지 가려야 했다. 가령 북한군은 철모가 없었다. 별이 새겨진 모표나 놋숟가락, 소련제 군화, 마오쩌둥 배지, 모시나강 탄피는 북한군 것이었다.
첫 발굴지인 다부동 전투지역에서부터 북한군 유해와 유품이 나왔다. 육군본부에서 “국군 발굴하랬더니 웬 빨갱이냐”면서 당황하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국군과 북한군이 전투를 벌인 지역에서 국군만 나올리 없었다. 중공군이 참전한 지역에서는 그들만의 유품이 나왔다. 적군에게도 예우를 다해야 했다. 국군 유해는 국립 현충원으로, 북한군 유해 등은 파주 적군묘지로 모셨다.
선주는 국군과 함께 나온 유품들을 보면서 한국전쟁기의 군대가 얼마나 허름하기짝이 없었는지를 실감했다. 참호를 파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야전삽은 조악했다. 이 삽으로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 싶었는데 노병들의 증언을 들으니 “한 분대에 야전삽이 하나였노라”고 했다. 유해들엔 인식표(군번줄)도 없었다. 인식표로 전사자의 이름을 찾는다는 말은 한국전쟁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이런 군대로 어떻게 전쟁을 했을까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북침을 했다는 주장이 터무니없이 느껴졌다.
선주는 2000년 초부터 예정됐던 1년간의 버클리대 교환교수 일정을 반납했다. 방학 때만 미국으로 나갔다. 해를 거듭하여 유해 발굴을 책임지고 하면서 이 일의 의미를 스스로 따져 묻게 되었다.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을 왜 하는가. 학문적 관심으로 덥석 맡았지만, 국가는 왜 굳이 50년 넘은 군인들의 유해를 찾아야만 하는가. 명료한 논리가 필요했다. 국방부 자료는 그 의미를 ‘인도주의’라는 낱말로 함축했다. 희생자의 넋과 가족을 위로하고 적군도 포용한다는 인도주의. 뭔가 한참 부족한 느낌이었다.
선주는 ‘국가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를 찾아냈다. 그 토대는 근대국가와 국민 간의 컨트랙트(계약)였다. 국가와 국민은 계약관계이고, 그 계약을 성실히 지키는 것이 국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식이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사자의 유해를 전투현장에 묻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전사자 유해까지 찾아내 가족의 품에 돌려준다”는 주의를 내세운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한국의 유해발굴은 미국식을 모델로 했다.
국민은 국가에 요청받은 납세와 병역 등 여러 의무를 수행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국민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 전쟁에 나가 죽어서 돌아오지 않은 이가 있다면, 주검이라도 찾아서 가족에게 돌려주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다. 선주는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내부 구성원에게 증명시켜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름없는 군인의 유해는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그렇다면 경식의 유해는 어떤 의미를 띠는가. 선주는 2001년 5월의 어느 날, 경기 가평군 설악면 엄소리 용문산 352고지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을 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경호의 방문을 받았다. 경호의 손에 들린 상자 안에는 대우중공업 노동자 경식의 뼈가 들어있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타살이 의심되는 뼈였다. 이건 그저 인권의 문제인가.
선주는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의문사를 대하는 태도 역시 국가 정체성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조금 더 강조되느냐가 다를 뿐이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데서 군인과 민간인은 다른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왕정도, 독재도 아닌 민주공화국이라면.
2000년, 2001년만 해도 이 일에 7년이나 잡혀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육군유해발굴단은 정해진 기한인 3년 만에 해체되지 않았다. 초기 발굴 성과에 대한 언론의 대대적 조명이 한몫했다. 그 한복판에 승갑이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손웅정 “자식은 부모 뒷모습 보고 성장한다”
- ‘민주 탈당’ 이상민, 결국 국민의힘 입당하기로
- “이재명 대구 오면 작업합니다” 협박 전화 60대 구속영장 청구
- 노토반도 해안선 200m 밀려났다…지진해일도 관측의 3배 가능성
- 경찰, 이재명 습격범 당적 공개 안 할 듯…신상공개 여부 검토
- 177명 탄 여객기 비행중 냉장고만한 구멍 ‘뻥’…긴급회항
- 윤석열·한동훈 체제가 증오·적대로 가득찬 이유
- ‘홍콩 ELS’ 판매 1위 국민은행, 직원들에 불완전판매 부추겼다
- 전국 영하 5~10도, 강풍에 더 춥다…내일 출근길 한파
- 케이티·포스코에 빨대 꽂는 권력…코리아 디스카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