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싱용’ 허위 계좌 개설…대법 “은행이 부실 심사했다면 무죄”

이슬비 기자 2023. 9. 2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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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정다운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범에게 대여할 목적으로 허위로 계좌를 만들었더라도 은행 직원이 개설 과정에서 부실하게 심사한 정황이 있다면 업무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업무방해·전자금융거래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지난달 31일 사건을 인천지법에 돌려보냈다.

A씨는 지인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성명 불상자에게 자신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대여해 자신이 대표이사로 된 유령법인을 설립했다. 또 부산 동래구 한 은행에서 자신이 대표이사로 있는 유령법인의 계좌를 개설해 해당 계좌의 현금카드와 접근매체 등을 성명 불상자에게 전달했다. A씨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총 4회에 걸쳐 유령법인의 계좌를 개설했고, 대가를 약속받고 개설한 계좌의 현금카드 등을 성명불상자에게 전달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A씨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2개월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A씨의 행위로 인해 금융기관들의 계좌 개설업무가 방해됐다고 볼 수 없다”며 업무방해 혐의에 대해선 무죄로 판단했다. 전자금융거래법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대가를 약속받고’ 현금카드 등을 대여한 부분을 유죄로 판단해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현금카드 등을 대여·보관해 줬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어떤 범죄에 이용될 것이라고 인식했는지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았다”며 무죄로 봤다.

대법원은 원심과 같이 업무방해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단순히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기재된 계좌개설 신청인의 허위 답변만을 그대로 믿고 그 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의 요구 등 추가적인 확인조치 없이 계좌를 개설해 준 경우, 그 계좌개설은 금융기관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이라며 “계좌개설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봐야한다”고 했다. 은행이 예금거래신청서나 금융거래목적 확인서 외에 A씨가 명의자로 있는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추가 자료를 요청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대법원은 2심 판결 중 A씨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를 일부 무죄로 본 부분은 잘못됐다며 판결을 파기했다. 대법원은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았는지는 행위 당시 피고인이 가지고 있던 주관적 인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된다”라며 “A씨가 현금카드 등을 대여한 경위, 진술내용 등에 비춰보면 A씨는 접근매체가 보이스피싱 사기 범행 등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도 이를 대여·보관했다고 볼 여지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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