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이 허물어질 때[꼬다리]
‘주권’이란 말의 힘을 몸으로 겪은 건 2008년과 2016년 촛불 시위 때였다. 헌법에는 국민 주권이 명시돼 있다는데 현실 삶에서는 그 힘을 느껴볼 일이 없었다. 거리에 선 시민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 제1조를 축약해 노래할 때 비로소 주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정치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목소리였다.
정치학 전공자로서는 이 말을 조금 제한적으로 이해한다. 국민이 주권을 갖는 것은 맞지만 매일 행사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주권은 의사 결정의 최종 권한이고, 대의제 민주정체는 정부와 의회라는 선출 권력에 결정권을 위임해 뒀다. 신과 혈통에서 주권의 기원을 찾는 왕정과 달리 인민의 동의를 근거지로 삼기에 이 정치체제는 독특하다.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처럼 “인민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가 된다”고 냉소하는 이들의 한편에 부당 권력을 회수할 최종적 힘이 국민에게 있다는 낙관론이 자리한 배경이다.
요즘은 한국 정치학자 김영민의 주장을 흥미롭게 봤다. 그는 국민주권론을 하나의 픽션(fiction)이라고 정의하는데, 엄연히 피치자가 다수인데도 소수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현상이 그에게는 신비였던 모양이다. “국민주권이라는 허구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통치받는 게 아니라 대리인을 통해 통치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문장을 나는 시민들이 주권을 언제든 회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위임 상태를 유지한다는 아이러니로 읽었다. 픽션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그가 따로 쓰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지난 9월 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대한민국 국민 5000만명이 모두 주권자로서 권력을 행사한다면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주권이라는 픽션의 미묘한 균형을 생각했다. 그는 “국민은 투표를 통해서 대통령을 뽑고, 지역구 대표인 국회의원을 뽑아서 대표를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며 “‘자유민주주의적인 국민주권론’이 하나 있고 ‘전체주의적인 국민주권론’이 있다”고 말했다. 대의제를 앞세워 촛불집회와 같은 시민참여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읽혔다. 김 장관 본인이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아 본의까진 알지 못하겠다.
다만 그가 무너뜨린 픽션을 생각한다. 제아무리 집권세력이라도 국민주권을 감히 부정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콕 집어 촛불집회를 폄하하고, ‘광우병 괴담’을 믿었다며 참가자를 비웃을 뿐이었다. 이견을 ‘대선 불복’이라 칭하고 억울하면 정권교체하라는 투로 엄포를 놓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 이후 전면화된 교사 시위에 대해 집권당이 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겠나. 집회 시위 시간을 제한하고 살수차 재도입을 시도하는 정부도 궤변일지언정, ‘준법집회’는 보장하겠다고는 한다. 선을 넘는 순간 게임이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광장을 두려워해야 권력을 오래 지킨다는 명제는 역사가 검증한 ‘영업 기밀’이다.
김 장관은 자신이 파괴한 픽션의 무게를 알고 있을까.
조문희 정치부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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