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큰 칼’은 국보 장검? 쌍룡검?[이기환의 Hi-story](101)
얼마 전 ‘이순신 장검’(2점)이 국보로 지정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 뉴스를 접한 여러분들은 대번에 이순신 장군(1545~1598)의 ‘한산도가’를 떠올렸을 겁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閑山島月明夜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한산도 야음(夜吟·밤에 읊다)’이란 시도 있습니다.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水國秋光暮)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구나(驚寒雁陣高). 근심스러운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은 활과 칼을 비추도다(殘月照弓刀).”
두 시에는 국운을 건 결전을 앞두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 충무공의 노심초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를 보면 장군에게 ‘칼’이 있죠. 장군의 상징인 큰 칼(大刀)을 차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이순신 장검이 ‘한산도가’와 ‘한산도 야음’에 등장하는 그 칼일까요.
전통 도검 연구자인 이석재 경인미술관장과 조혁상 홍익대 초빙교수의 도움으로 풀어봅니다.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이순신 장검’ 두 자루 모두 길이가 2m에 가까운 어마 어마한 칼입니다. ‘장검 1’은 196.8㎝(칼날 137.3㎝·칼자루 59.5㎝), ‘장검 2’는 197.2㎝(칼날 137.8㎝·칼자루 59.4㎝)에 이릅니다. 무게는 4.32(장검 1)~4.20㎏(장검 2)입니다. 칼집과 가죽끈까지 합치면 그 무게가 5.72㎏(장검 1)~5.44㎏(장검 2)에 이르죠.
두 장검의 칼날에는 이순신 장군이 손수 지은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三尺誓天山河動色)”(장검 1),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一揮掃蕩血染山河)”(장검 2)는 시구입니다.
이 구절은 1795년(정조 19) 왕명에 따라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시구 그대로입니다.
<이충무공전서>는 “장검 한 쌍이 공(이순신)의 후손 집에 전해오는데 공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고 전했거든요.
또 칼자루 속 슴베(칼자루와 칼날의 결합부)에는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난중일기> 1595년 7월 21일자는 “태구련(태귀련)과 언복이 만든 칼을 충청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한 자루씩 보냈다”고 했습니다. 태귀련·이무생이 장검 두 자루를 이순신 장군에게 바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955년 채록된 태씨 문중 후손의 증언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즉 태귀련·이무생은 왜구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10년간 도검 제작술을 배웠고요. 임진왜란이 터지자 왜군의 길잡이가 돼 귀국했답니다. 하지만 이순신 군대에 붙잡혀 ‘반역자’ 죄목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요.
이때 두 사람이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자 장군은 “그럼 대신 칼을 만들어 보라”고 명했답니다. 두 사람은 10년간 배운 모든 기량을 다해 장검 두 자루를 만들어 바쳤답니다. 이번에 국보가 된 ‘이순신 장검’입니다.
이순신 장검은 왜색?
이순신 장군의 손때와 정신이 담겨 있는 ‘장검’ 두 자루는 왜 지금까지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을까요. 이 ‘이순신 장검’이 일본도의 양식을 따랐다는 구설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지적이 타당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도검 연구자들의 견해입니다.
물론 이순신 장검이 일본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우선 슴베와 칼자루를 결합해 못을 끼워 고정하기 위해 뚫은 구멍(목정혈·目釘穴), 칼자루 가죽끈을 엑스(X)자로 교차매기한 방식이 그렇고요. 칼날의 ‘휨 정도’나, 피를 흘려보내려고 판 일본식 피홈(혈조·血漕) 등도 그렇습니다.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은 “칼날에서 칼끝과 칼몸이 이어지는 부분에 급격하게 두께 변화를 준 요코테(橫-よこて)의 완연한 흔적도 일본풍”이라고 전했습니다. 물론 일본풍의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칼자루 표면에 붙인 금속판, 표면에 은실을 박아 장식한 철제 부속의 전통 무늬 등이 조선풍입니다. 칼날에 새긴 글씨와 물결무늬, 칼집을 차고 다는 장식과 가죽끈 그리고 칼집 상단의 테두리 및 하단의 마개장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순신 장검은 조선칼의 주된 요소에, 일부 일본풍의 요소를 결합한 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칼이 허접했던 이유
그래도 그렇지 다른 분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칼에 왜색이 가미돼 있다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 30만명이 200년 평화를 구가하던 조선에 물밀듯 쳐들어오죠. 조선은 속수무책,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무기도 형편없었습니다. 칼은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온 스페인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테데스(1551~1611)의 평가가 실감납니다.
“조선인이 사용하는 무기는 매우 빈약했으며, 특히 칼은 길이도 매우 짧고 가늘었다.”(<예수회 연례보고서>·1592)
당시 조선의 무기가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조선 개국 후 200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주력 병기는 궁시(활과 화살)와 화포였습니다. 칼은 보조 병기였답니다. 반면 일본은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말까지 150여 년의 전국시대를 거쳤습니다. 특히 근접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칼과 창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왜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와 길고 날카로운 칼을 마구 휘둘러대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선택은 3가지였겠죠. 일본군에게 노획한 일본도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일본도의 칼날만 빼내 익숙한 조선검의 외장과 결합해 쓰거나, 아니면 일본도의 칼날 등을 차용해 새로운 칼(일본+조선식 칼)을 제작하거나 하는 방법을 썼겠죠.
일본칼을 개조한 의병장들
실제로 의병장과 의병들은 급한 대로 포획한 왜군의 무기를 그대로, 혹은 개조해 실전 사용했습니다.
곽재우 장군(1552~1617)의 ‘장검’(보물)을 볼까요. 일본도의 칼날과 외장을 그대로 사용했고요. 일본 칼집 특유의 고즈카(小柄·칼집 바깥쪽에 끼는 작은 칼) 및 고가이(?·머리카락 정돈과 귀이개용 도구) 꽂이 부분만 나무로 덧대어 막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조선제 장식으로 바꿔 달았습니다.
권응수(1546~1608), 정기룡(1562 ~1622), 최진립(1568~1636), 이광악(1557~1608) 장군의 칼도 비슷합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풍 칼의 장점을 조선칼의 제작에 일부 적용했습니다. 단적으로 전형적인 일본풍인 칼자루의 ‘X자 줄매기’는 1813년 발간된 군사교범(<융원필비>)에 수록된 환도(조선칼)의 도해에 등장합니다. 그 정도로 보편화했습니다.
이순신 장검은 실전용인가
이 대목에서 또 한가지 궁금증을 해소해봅시다. 이순신 장군은 과연 이 장검을 직접 차고 전투에 임했을까요.
‘한산도가’에도 “큰 칼(大刀) 옆에 차고…”라는 구절이 있잖습니까. 천하의 이순신 장군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2m에 근접하고 칼의 무게만 5㎏에 육박하는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잡는 지점에 따라 실제로 느끼는 체감 무게가 2~3배 증가합니다. 더구나 힘을 실어 휘두를 때는 순간적으로 칼끝에 실리는 무게가 수십㎏ 이상이 될 겁니다. 만약 실전에서 이순신 장검을 휘두르게 되면 어찌 될까요.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칼이 사람을 휘두르는 격이 되겠지요. 이석재 관장은 “이순신 장검 두 자루에는 실전에 사용한 격검흔(칼날끼리 부딪쳐 이가 어긋난 흔적)과 균열, 휨, 뒤틀림 같은 칼날의 변형 현상도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순신 쌍룡검의 출현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찼다는 ‘큰 칼’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 단서가 있었습니다. 일제가 설립한 조선고서간행회가 발간한 <조선미술대관>(1910)에 이순신 장군이 차고 다녔다는 칼 사진이 나옵니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장검은 아니고, ‘쌍룡검’의 사진과 함께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소장처는 궁내부박물관(1908년 설립·이왕가박물관)이라고 했고요. 설명문은 “…이 칼은 우리(일본) 군대와 싸웠던 명나라 이순신이 패용했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칼등에 새겨진 시를 소개했습니다.
“쌍룡검을 만들어 얻으니(鑄得雙龍劒)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千秋氣尙雄).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盟山誓海意) 충성스러운 의분은 고금에 같다(忠憤古今同).”
이 시구가 주목을 끌었습니다. 순조 연간(1800~1834)에 훈련도감을 지낸 박종경(1765~1817)의 문집(<돈암집> ‘원융검기’)에도 이 시와 함께 이순신 쌍룡검이 등장합니다.
“1811년(순조11) 어느 날 병조판서 심상규(1766~1838)가 찾아와 ‘이충무공이 차고 다닌 검’이라면서 ‘난 서생이라 쓸 데가 없으니 상장군이 된 자에게나 어울리겠다’면서 나(박종경)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박종경은 그러면서 “칼등에 ‘쌍룡검을 만들어 얻으니(鑄得雙龍劒)’하는 시구가 있다”고 소개합니다.
훗날 발간된 <조선미술대관> (1910)에 등장하는 바로 그 시입니다. 박종경은 그렇게 얻은 쌍룡검 한 자루를 걸어놓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10여 일 뒤 지인이 찾아와 ‘똑같은 검을 찾았다’고 전했습니다.
“제가 충남 아산에서 온 사람한테서 샀는데, 장군이 아끼는 검과 어찌 그리 똑같다는 말입니까.”
박종경도 “과연 벽에 걸어놓은 검을 비교해보니 쌍둥이처럼 같았다”고 했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진 쌍룡검은 어디?
이순신 장군이 차고 있던 쌍룡검이 정말로 존재했다는 얘기네요. 아마 이 쌍룡검은 박종경이 근무했던 훈련도감을 거쳐 궁내부박물관(훗날 이왕가박물관)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럼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어디엔가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안타깝습니다. 그 쌍룡검은 지금 행방이 묘연합니다.
국권침탈 직전인 1910년 4월 1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창경궁에 충무공이 쓰던 칼이 있는데 이 비상시국에 그 칼을 쓸 자가 누구냐”고 꼬집는 시조가 실립니다. 창경궁 궁내부박물관에 존재했다는 얘기죠.
그런데 2년여 뒤인 1912년 5월 26일자 권업신문은 “일제가 창경궁 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이충무공의 원융검(쌍룡검)을 치워버렸다”고 개탄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후 ‘쌍룡검’이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그사이 ‘이순신 쌍룡검은 원래 없었다’, ‘쌍룡검은 이충무공의 충혼을 기려 후세의 인물이 만든 칼’이라는 등의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쌍룡검이 맞나
최근에는 <조선미술대관>의 사진에 등장하는 두 칼이 박종경의 ‘원융검기’에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냐”고 감탄했던 쌍둥이칼과 다른 칼이라는 견해가 등장했습니다.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두 자루의 칼을 한번 자세히 보라는 겁니다. 과연 칼등 명문 20자만 같을 뿐 뜯어놓고 보면 모든 부위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칼날의 ‘휨 정도(곡률)’를 보십시오.
아래 칼을 기준으로 위 칼이 43도 정도 뒤로 누워(기울어져) 있는데요. 그렇게 누운 위 칼을 바로 올렸다고 치고 계산하면 위 칼은 아래 칼보다 70%(1 대 1.71) 이상 더 ‘휨의 정도(곡률)’가 큽니다.
이 정도의 휨 차이라면 두 칼은 전혀 다른 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미술대관>의 쌍룡검 사진설명은 ‘이순신=명나라 장수’로 소개했습니다. 간과할 수 없는 오류입니다.
정리하자면 박종경의 ‘원융검기’와 <조선미술대관>에 등장하는 쌍룡검은 서로 같은 칼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각각 두 자루의 칼이 이순신 장군의 것이 맞니, 아니니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순신 장검’의 국보 승격을 계기로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장군의 칼을 한번 뒤져보면 어떨까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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