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의원 대부분 내각제 지지했지만, 혼자 힘으로 대통령제 이끌다
‘5·10 총선’부터 보름이 지난 1948년 5월 31일에 국회 본회의가 열렸다. 오전 회의에서 이승만이 198표 가운데 188표를 얻어 국회의장으로 뽑혔다. 부의장엔 신익희와 김동원이 뽑혔다.
오후엔 국회 개회식이 열렸다. 애국가 봉창(奉唱),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만세 삼창으로 이어진 의례가 끝나자, 이승만 의장의 식사(式辭)가 있었다. 그는 “우리가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야 모인 것”임을 지적하면서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야 오날에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에 유일한 민족 대표 기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이어 그는 민국의 기원이 3·1 독립운동임을 상기시켰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혀서 국민 대회를 열고 대한 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야 민주주의에 기초를 세운 것임니다.”
국회를 이끄는 이승만은 헌법 제정을 서둘렀다. 북한엔 이미 오래전에 실질적 정권이 세워진 터였다. 북한 정권과 피할 수 없는 정통성 경쟁에선, 유엔의 승인을 받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늦어도 8월 안에 헌법 제정을 마칠 생각이었다.
곧바로 위원 30명으로 이루어진 헌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되고 전문위원 10명이 임명되었다. 전문위원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은 유진오가 헌법 초안 작성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당시 의석 분포를 보면, 김성수가 이끄는 한국민주당(한민당), 이승만을 따르는 독립촉성국민회(독촉), 그리고 무소속이 각기 3분의 1가량 되었다. 중론은 한민당이 다른 두 집단보다 약간 우세해서 제1당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자연히 한민당과 독촉이 함께 지지하는 이승만이 집권하리라고 모두 예상했다. 불행하게도 한민당과 이승만 사이엔 권력 구조에 관한 논의가 없었다. 그래서 양측이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가장 큰 정당이라고 자임한 터라, 한민당은 내각책임제를 당론으로 삼았다. 그리고 유진오는 내각책임제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은 내각책임제를 바탕으로 성안되었다.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한국 처지에선 대통령제가 내각책임제보다 훨씬 낫다고 여겼다. 원래 그는 미국의 대통령제를 최선의 제도로 신봉했다. 다양한 지역과 더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미국 사회가 자유롭고 번영하는 것은 미국의 권력 구조가 최선임을 보여준다고 믿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제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잘 알았고 그런 지식 덕분에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펼 수 있었다. 그는 내각책임제가 입헌군주제에서 연유했음을 깊이 인식했다. 그래서 내각책임제는 본질적으로 민주정체와 잘 어울리지 않으며, 군주가 없는 나라에선 내각이 안정적으로 기능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세는 내각책임제로 기울었다. 이승만이 헌법기초위원회의 회의장을 찾아 대통령제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위원회는 그의 뜻을 무시하고 내각책임제에 바탕을 둔 초안을 의결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위원회에 나와서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연설을 마치면서, 그는 선언했다. “만일 이 초안이 그대로 국회에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나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으로 남아서 국민운동이나 하겠소.”
이승만의 선언에 의회는 멈췄고 정국은 얼어붙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에 맞서서 5·10 총선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민족 지도자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집권해서 나라를 이끌리라고 여긴 정치 지도자였다. 그를 대신할 지도자는 없었다.
김성수의 자택에 한민당 요인들이 급히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승만의 뜻을 따라 대통령제로 바꾸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그 작업도 쉽지 않았다. 그러자 김준연이 나섰다. 학식과 경력이 뛰어난 그는 장덕수의 뒤를 이은 한민당의 이론가였다. 그는 연필을 들고 헌법 초안에서 몇 군데를 고치고서 김성수에게 내밀었다. “자,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김성수는 급히 유진오를 불렀다. 김준연이 고친 초안을 보자, 유진오는 기형적 정부가 되리라고 경고했다.
김준연이 물었다. “앞뒤 연락은 되지요?”
유진오가 대답했다. “네. 연락은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터라, 그 초안은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제가 절충된 모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안에 들어있던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과 국회의 내각 불신임권이 삭제되고 대통령의 임기가 5년에서 4년으로 줄어들었다. 이 수정안이 안은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을 국민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뽑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으므로, 결국 대통령 간선제가 채택되었다.
1948년 7월 17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식’에서 이승만은 헌법 정본 2부(국한문본과 한글본)에 서명했다. 이어 헌법이 마련되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3천만 국민을 대표한 대한민국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야 3독 토의로 정식 통과하야 오날 이 자리에서 나 이승만은 국회의장 자격으로 이 간단한 예식으로 서명하고 이 헌법이 우리 민국의 완전한 국법임을 세계에 선포합니다.”
당시 거의 모든 의원은 내각책임제를 지지했지만, 이승만은 혼자 힘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제를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이 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떠한가?
이승만이 하야한 뒤, 1960년 6월에 헌법이 개정되어 내각책임제가 채택되었다. 그 헌법에 따라 8월에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압도적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분열해 치열하게 다투었다. 그래서 신파가 꾸민 장면 내각은 9개월 동안 세 차례나 개각을 했다.
게다가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여서 끊임없이 장면 내각을 비난하고 견제했다. 특히 대통령이 군 통수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서, 장면 총리와 다투었다. 이것은 치명적 실책이었으니, 장면 내각은 군부 안에서 정변 움직임이 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5·16 군부 정변’이 성공함으로써 헌법에 따른 체제가 무너졌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세워진 프랑스 제4 공화국의 경험이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독일군에 점령당했던 비참한 경험, 독일에 부역한 비시 정권이 부른 깊은 사회적 분열, 그리고 노동조합을 장악한 공산당의 끊임없는 선동과 파업으로 사회가 무척 불안했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제4 공화국은 이처럼 불안정한 상황에 대응할 수 없었다. 특히 해외 식민지들에 대한 합리적 정책을 추진할 수 없어서, 인도차이나에서 비참하게 패배했다. 그래서 1946년부터 1958년까지 12년 동안에 정권이 무려 21번 들어섰다. 결국 국민투표를 통해서 제4 공화국은 해체되었다. 대신 대통령제를 채택한 제5 공화국이 들어섰다.
따라서 사회가 불안하고 응집력이 약한 상황에선 내각책임제를 도입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이승만의 판단을 역사는 지지하는 셈이다. 특히 내각책임제에선 행정에 직접 간여하지 않는 국가원수의 기능이 정부의 영속성에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정부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데에선 세습 군주가 선거를 통해서 뽑힌 대통령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교훈을 보여주었다.
1960년은 대한민국이 불법적으로 침입한 북한군과 중공군을 물리쳐 국방을 확고히 한 뒤 사회적 안정을 이룬 때였다. 이런 시절에도 내각책임제는 안정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헌법이 제정된 1948년은 남한 사회가 극도로 불안하고 응집력이 없는 시절이었다. 실제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뒤에 국군 일부가 반란을 일으킨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국회 기반이 약하고 임기가 보장되지 않은 국무총리가 제대로 통치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대통령제가 채택되면서, 가장 큰 손해를 본 세력은 국회에서 세력이 가장 컸던 한민당이었다.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이있으므로, 대통령제를 유지하는 한 한민당은 집권할 수 없었다. 자연히 한민당은 내각책임제를 도입하려 애썼다. 마침내 1950년 1월에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이어진 격렬한 대결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이 이겨서, 대통령제는 유지되었다.
북한의 ‘지하 선거’ 공작
남한 총선거가 성공적으로 실시되어 국회가 구성되었어도, 러시아는 남한 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는 남한에 들어설 자유주의 정권보다 북한에 이미 들어선 전체주의 정권이 정통성에서 우위를 확보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1948년 7월에 38선을 넘어온 남로당 요원들의 주관 아래 군 단위로 대표자들을 뽑는 ‘지하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렇게 뽑힌 대표자들이 북한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는 대의원들을 뽑을 터였다. 물론 제대로 된 선거가 아니라 당이 지명한 후보를 지지하는 공산당식 선거였다.
“5·10 선거가 지나고 얼마 없어 동네 청년들은 집마다 다니면서 도장을 받아갔다. 우리 아버지는 물었다. ‘무슨 도장이라?’
‘인민위원 선거하는 거우다.’
아버지는 도장을 내주면서 다시 물었다. ‘무사 5·10 선거 때는 투표 못 하게 산으로 내쫓더니 이번은 도장 받아 감서?’
‘그땐 남조선 단독 선거 아니우꽈! 이번은 통일 조선 선거라마씸!’ 하고 도장 찍고 갔다.
‘이건 무슨 소리인지 원… 알 수가 없는 세상일세’ 하고 아버지는 한숨을 쉬셨다.(현임종 ‘내가 겪은 4·3′ ‘본질과 현상’ 2018년 여름호)
남한 전역에서 ‘지하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른 남로당 요원들은 다시 월북했다. 그들은 해주에 모여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서 남한에 배정된 대의원 360명을 뽑았다.
‘4·3 사건’을 주도한 김달삼은 제주도 대표자들을 이끌고 대표자 대회에 참석했다. 제주도에서 세운 혁혁한 전과 덕분에, 그는 박헌영이 주재한 그 대회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제주도 투쟁”의 승리에 기여한 으뜸 요인으로 “인민과의 연계! 인민의 지지!”를 꼽았다.
이어 김달삼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국기 훈장 2급을 받았다. 9월엔 김일성 등 49인으로 만들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지하 선거’를 통해서 뽑힌 대표자들이 북한의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북한 지역 대표들을 뽑지 못한 남한의 총선거보다 튼실한 명분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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