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바깥길] 오래된 거리

한겨레 2023. 9. 1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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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바깥길]일터에서 다치는 사람들도 좀체 줄지 않고, 취약한 노동자들은 아직 그나마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를 위한 포괄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센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센터의 이름이 뭐냐고 묻자, ‘전태일의료센터’란다. 다시 전태일. 그가 몸을 태운 지 5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가 서 있던 골목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부산 수정동. 1년 만에 찾은 부모님 집은 아직 새로운 냄새가 가시지 않은 아파트였다. 따가운 여름 볕이 높은 대리석 벽면에 닿으면 깨어진 병 조각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파트 뒤쪽 그늘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늘 속에는 시장 골목길이 무심하게 뻗어 있다. 살기를 더해가는 더위에 가망 없이 맞선 해묵은 선풍기 옆에서 할머니는 행여 생선에 파리가 앉을까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갑자기 날 선 목소리가 쏟아졌다. 옆집에서 꽃 장사를 하는 중년 사내가 원전 오염수 괴담으로 생선 장사 망하게 되었다며 할머니에게 울분을 토했다. 꽃 장수가 생선 장수를 걱정했다. 생선 할머니는 오염수가 아니라 괴담 때문이냐고 되물으면서도, 이러나저러나 우린 망했으니 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더운 여름날 오래된 시장 골목, 잊었던 ‘유언비어’가 파리 떼같이 돌아오고 있었다.

서울 광화문. 옛것이 새옷 걸치고 고적해진 동네에서 잠시 지냈다. 새벽이면 인왕산을 오르고 낮이면 광화문으로 나섰다. 그새 광화문 거리는 세련되었다. 아기자기한 분수 터널 속으로 아이들은 뛰어다녔다. 행여 분수 물에 아이가 넘어질까 부모들은 땡볕에서 땀을 쏟아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저 아득하고도 지긋한 부모의 노릇. 그 뒤편으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내 새끼 지상주의”로부터 자신들과 교육을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분수 물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는 사막 같은 거리에서 그들은 모두 까만 옷을 입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느 정치인은 거들었다. 이런 행위는 “신성한 선생님을 스스로 노동자로 격하시킨” 것이라고. 선생님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것마저 부인당하는, ‘신성’하다는 미명하에 길거리 껌딱지 취급당하는 시절이 다시 슬금슬금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청계천은 복원된 지 오래이지만, 광화문 거리에는 복원된 것이 매일 부정당하고 있었다. 다시 힘겨운 거리, 오래된 거리가 돌아오고 있었다.

서울 창신동. 지하철 동대문역에서 창신동으로 찾아가는 날, 오랜만에 비가 왔다. 비는 본디 지상의 것들이 들떠 나돌아다닐 때 그 모든 것을 샅샅이 모아서 지상으로 되돌려주는 것. 창신동은 변함없이 꼬불거리는 오르막, 서로 엉켜 영영 떼어내지 못할 것 같은 전깃줄 더미였다. 한때 다방이었던 곳이 카페로 바뀌었을 뿐, 의자도 그전의 것이고, 이제 카페 주인이 된 마담의 걸쭉한 수다도 여전했다. 창신동은 한때 자지동(紫芝洞)이었단다. 졸지에 ‘천한’ 노비가 되어 버린 조선의 어느 불운한 왕비가 생계 삼아 염색을 했는데, 옷을 물에 담그면 절로 자줏빛이 되었다고 한다.​ 타인의 안락함을 위한 노동의 각박함은 세월이 지나도 골목 구석마다 빛나는 교회 십자가들만큼이나 선명하지만, 최근 그 노동의 십자가를 외국인들이 떠맡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만큼 창신동에서는 골목이 층층이 더 쌓여가고, 빗물은 몰아치듯 아래로 흘렀다.

왼쪽으로 돌아선 어느 골목 구석. 전태일재단이 거기에 있었다. 건물 안에는 마치 봉제공장처럼 이런저런 단체들이 보금자리를 나누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정치적 변화를 도모하리라는 은밀한 ‘기대’를 가졌다면 금세 실망하는 곳이다. 컴컴해진 바닥장판처럼 소박하지만 힘겨운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급전이 필요한 취약노동자들을 도울 궁리를 하는데, 돈이 없어 전전긍긍이다. 배달노동 하다가 사고가 나면 치료비를 변상 못 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사람들이 구하는 돈의 액수는 20만원이고 30만원이다. 적은 돈이지만, 사채의 검은손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충분히 큰돈이다. 이를 막아보려고 머리 맞대고 노동공제조합을 만들었다. 이름은, 세상에, 다시 ‘풀빵’이다. 고위공직 후보자에게 수백억원 재산이 있어도 더는 놀라지 않는 세상인데, 이쪽은 전태일이 버스비를 아껴 동생 같은 여공들에게 풀빵을 나누어 주던 마음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오래된 골목,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서울 면목동. 동쪽으로 좀더 가면 면목동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사가정역으로 가야 했다. 낯선 이름 ‘사가정’. 조선시대 문인이자 온갖 관직을 두루 거친 서거정의 호를 땄다고 한다. 우린 여전히 배운 자의 권력에 후하다. 권력의 추억이 짙은 역에서 벗어나 걷다 보면 노동의 아픔으로 푸르른 ‘녹색병원’이 보인다. 1980년대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들이 오랜 싸움 끝에 보상받은 돈으로 만든 병원이다. 다치고 아픈데 돈 없어 더 서러운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일터와 거리에서 목소리 높이다 경찰에게 험한 일 당하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상처의 이유를 묻지 않고 상처의 아픔을 먼저 만져준다. 만들어진 지 어언 20년. 국제적으로 소문이 자자한 한국의 국민의료체계를 생각하면 이 병원은 ‘추억의 병원’이 됐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성황리에 운영 중이다. 일터에서 다치는 사람들도 좀체 줄지 않고, 취약한 노동자들은 아직 그나마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 일은 줄지 않고 매일 늘어난다. 일터의 병 목록도 늘었다. 그래서 이를 위한 포괄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센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센터의 이름이 뭐냐고 묻자, ‘전태일의료센터’란다. 다시 전태일. 그가 몸을 태운 지 5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가 서 있던 골목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다.

다시 광화문. 선생님들은 이제 없다. ‘교직의 신성함’을 말하면서 ‘신성모독’을 버젓이 행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여의도로 갔다고 했다. 간절한 소리가 사라진 곳은 거대한 국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태극기,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의 깃발. 깃발은 날리고, 노래는 ‘뽕짝’이었다. 몇개 되지 않는 구호도 들렸지만, 그것은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제 뭔가를 다시 찾았음을 확인하고 축하하는 함성이었다. 잠시 내주었던 거리에 보란 듯이 다시 찾아와 짓는 환한 웃음, 그리고 결코 다시 내어주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결의. 오래되었으나 잊히지 않는 장면이 북악산을 스크린 삼아 싸구려 삼류영화처럼 펼쳐졌다. 거리가 온통 과거에게 아첨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여름 오래된 거리에 가 보았다. 낡음이 익숙한 소리처럼 웅성거리는 거리.*

(*진은영의 시 ‘청혼’을 변형적으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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