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성산일출봉 아래 서로 다른 곳을 향한 시선들

김봉규 2023. 9. 1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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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제노사이드의 기억 제주 _07

제주에서 열리는 4·3위령제를 여럿 찾아다녔지만, 경찰과 해병전우회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유가족들과 섞이지 못하고 서먹서먹해 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서 있었다. 어색하고 묘한 분위기였다. 군복과 경찰 제복만 보아도 싸해지는 희생자 유가족들의 골 깊은 마음속이 느껴지는 듯했다.

2015년 11월5일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터진목학살터에서 열린 ‘성산읍 4·3 희생자 위령제’를 찾았다. 참석자 가운데는 경찰도 보였고, 얼룩무늬 군복에 빨간 명찰과 팔각모를 쓴 채 사람들을 안내하던 해병전우회원들도 있었다. 그들은 유가족들과 섞이지 못한 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먹서먹하게 서 있었다. 김봉규 선임기자

제주에서도 경관이 뛰어나다는 ‘영주십경’의 첫번째인 성산일출봉. 제주섬의 비경인 성산일출봉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올레길 1코스를 걷다 보면, 끝나는 지점 가까이 물때에 따라 길이 끊기기도 이어지기도 했던 터진목(터진 길목)이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풍광은 막힘이 없이 시원하다. 육지 사람들에겐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명소이기도 하다.

그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터진목은 제주 4·3 당시 성산면 주민들의 일상적인 집단 학살터였다. 성산지역 희생자 460여명 가운데 터진목에서 30여차례 210여명이 죽임을 당했다. 희생자 가운데는 노인과 어린아이, 부녀자도 많았다. 이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던 군인들은 당시 성산포에 주둔하고 있던 서북청년회(서청) 중심의 특별중대였다. 서청은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토벌대 군인들의 전위대 역할을 하던 극우청년단이다.

터진목에서의 학살극을 목격했다는 조주삼(78세, 증언 당시)씨는 “모두 혼이 나갔는지 살려 달라고 빌거나 우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사람은 목이 탔는지 짠 바닷물을 마시기도 했다”면서 “주검이 바닷물에 쓸려 가기도 했고 목만 남아 뒹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제민일보 ‘4·3은 말한다’(1998) 5편 65쪽) 그 무렵 성산서국민학교에서 등사판(인쇄기)이 없어지자 ‘무장대의 삐라 제작을 위해 빼돌렸다’는 혐의로 성산서국민학교와 성산동국민학교 교사 6명이 이곳에서 총살됐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홍경토씨는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 가슴 아픈 사연을 말했다. “그때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정아무개 선생 덕분입니다. 정 선생은 나의 약혼녀였는데 한달 만에 풀려 나와 보니 정 선생은 차아무개라는 사람과 결혼해 있었습니다. 날 살려주는 조건으로 서청 간부와 결혼한 것입니다.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라고 증언했다.(위 책 66쪽) 터진목에서는 서북청년회의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 강매를 거부한 고성리와 난산리 주민 33명이 보복 집단학살되기도 했다.(‘제주 4·3사건 추가진상보고서’ 193쪽)

지난 2015년 11월5일 터진목에서 열린 ‘성산읍 4·3 희생자 위령제’를 찾았다.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위령비 제단에 유가족들이 술을 치고 있었는데 참석자 중에는 경찰도 보였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해병전우회 회원들이었다. 나이 든 해병전우회원들은 얼룩무늬 군복에 빨간 명찰과 팔각모를 쓰고 호루라기와 불방망이를 휘저으며 주변 차들을 통제했고, 기동대장이라고 쓴 붉은색 완장을 찬 회원은 사람들을 추모식장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열리는 4·3위령제를 여럿 찾아다녔지만, 경찰과 해병전우회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유가족들과 섞이지 못하고 서먹서먹해 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서 있었다. 어색하고 묘한 분위기였다. 군복과 경찰 제복만 보아도 싸해지는 희생자 유가족들의 골 깊은 마음속이 느껴지는 듯했다.

오종구 성산읍 4·3희생자 유족회장(78세)은 “사람들은 용서와 화해를 말하고는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시간이 워낙 많이 흘렀다. 이제는 잊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혹시 마을에 4·3 당시 가해자들이 살고 있느냐 여쭸더니 “그렇다. 희생자들에게 해코지했던 사람이 마을에서 함께 살고 있다. 누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성산읍뿐만 아니다. 제주에서는 부모님들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과 함께 사는 마을이 꽤 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봄 다시 터진목학살터를 찾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돼서인지 관광객들이 주변 노란 유채꽃밭에서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바로 옆으로 학살터 위령비가 서있지만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광치기해변의 잔잔한 바닷물결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오기는 했지만, 저 멀리 신축건물을 짓기 위해 동원된 중장비의 엔진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학살터를 벗어나려고 돌아서는데 검은색 표석이 눈에 띄었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쓴 ‘제주기행문’ 일부를 발췌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섬에는 우수가 있다. (…) 이 모든 것은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인구의 10분의 1)을 자행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김봉규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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