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갈증' 풀어준 47년…상록야학, 코오롱 우정선행상 대상
"사업이 부침을 겪으면서 야학 운영이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한 번도 학교 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고 해요. 배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늘 있으니까요. 저도 학생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성장하는 것처럼 마음이 좋았어요"
19일 서울 마곡 코오롱 원앤온리타워에서 열린 제23회 오운문화재단 우정선행상 시상식. '상록야학'의 2대 교장이자 창립자 고(故) 박학선 교장의 미망인 한윤자 씨는 이 같이 말했다. 상을 수여한 이웅열 오운문화재단 이사장은 "앞으로의 여정에 우정선행상이 새로운 원동력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답했다.
코오롱그룹 회장 자리에서 은퇴한 그가 1년에 단 한 번, 그룹 비영리 재단 오운문화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마곡 원앤온리타워를 찾는 날이 우정선행상 시상식이다. 우정선행상은 23년째 우리 사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행을 베풀어 온 이들을 격려해 왔고, 올해 대상은 47년째 늦깎이 학생들의 배움터가 되어온 상록야학에 돌아갔다.
상록야학은 빈농 가정에서 자라 제때 배우지 못한 아픔을 삼켰던 고(故) 박 교장이 사재를 털어 1976년 3월 서울 이문동사무소 회의실에 교실을 마련하면서 시작됐다. 박 교장은 운영하던 기성양복 사업이 번창하자 본인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찍이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재 교육과정은 2년제 중·고교 과정이 중심이다. 지난해엔 1년제 초등 과정을 새로 열었고 일종의 시민학교인 '열린강좌'도 개설했다. 열린강좌는 최첨단 기술 발전 속도에 뒤쳐져 어르신들이 사회에서 소외받는 모습이 안타까워 박 교장이 제안한 수업으로 생활영어, 컴퓨터 등을 가르친다. 세상과 소통하려는 어르신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박 교장이 야학 교실을 개설한다는 벽보를 보고 찾아온 36명의 만학도들이 처음 입학했던 상록야학은 지금까지 8000명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했다. 교단을 거쳐간 교육봉사자 수도 1300명에 이른다. 지금도 상록야학에선 50~80대 1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못다 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 교장은 지난해 10월 입원 중이던 대학병원에 3억원을 기부한 후 영면했다. 빈소를 찾은 졸업생들은 늦깎이 공부의 설렘과 고인과 함께했던 자신들의 소중한 추억을 떠올렸다. 미망인 한윤자 씨가 2대 교장으로서 상록야학의 명맥을 이어가고자 결심한 계기였다. 한 교장은 "우정선행상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살고 있다며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게끔 격려해주는 뜻깊은 상"이라고 말했다.
오운문화재단의 우정선행상은 2001년부터 우리 사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행을 베풀어 온 이들의 미담 사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살맛나는 세상'을 가꿔온 봉사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왔다. 이날 시상식에서 이 이사장과 손봉호 심사위원장을 비롯한 심사위원, 지난해 수상자 등이 올해 수상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함께했다.
올해 시상식에선 대상을 수상한 상록야학 외에도 18년째 무연고 고인들의 장례를 치러준 강봉희 씨, 온갖 질병과 싸우면서도 42년간 이·미용 봉사를 이어온 김정심 씨, 청각장애인 가족들의 소통을 도와왔던 수어통역 봉사단 '손으로 하나되어'가 각기 우정선행상 본상을 받았다.
본상을 수상한 장례지도사 강봉희 씨는 가족과 연이 끊겨 홀로 죽음을 맞이했거나 장례비 마련이 어려운 기초생활수급자 등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들의 쓸쓸한 마지막을 존엄하고 따뜻하게 배웅해왔다. 본인의 암투병 경험을 계기로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18년간 900명에 가까운 고인의 장례를 도왔다.
20대 때부터 시한부 판정을 받을 만큼 질병과 싸운 김정심 씨는 살아있는 동안 값지게 살고자 하는 생각에 시작한 이·미용 봉사를 42년간 해왔다. '손으로 하나되어'는 2003년 경기도 수어교육원에서 교육받은 평범한 직장인 4명으로 시작해 올해로 20년째를 맞은 수어 봉사 동아리로, 현재 12명이 활동 중이다.
이웅열 이사장은 "제23회 우정선행상 수상자 여러분들은 타인을 위해 각자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사랑을 실천해 오셨다"며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안정준 기자 7up@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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