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힘을 다해서 일본에서 꼭 살아남겠습니다“

김종수 2023. 9. 1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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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86)] ‘불도저’ 박세진

 

2016년 KBL 신인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9순위로 전주 KCC에 지명되어 프로 무대에 입성한 박세진(30‧201cm)에게 이번 FA 시장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름값 높은 선수들이 거액의 계약을 체결하며 화려한 축제를 즐기는 동안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팀은 어디에도 없었다. 좋은 조건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저 코트에서 계속 뛰기만을 원했다. 결국 작은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고 계약 미체결로 은퇴 위기까지 내몰리게 된다.


“고민이 많았습니다. KCC에서는 불러주는 팀이 없으면 은퇴하고 매니저를 하는게 어떠냐고 배려를 해줬지만 이대로 은퇴라는 단어를 이름 앞에 꺼내들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대단한 선수가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만 단 한 시즌이라도 후회없이 제대로 뛰어보고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후회가 없을 것 같았거든요”


농구에 목이 마른 박세진의 선택은 일본행이었다. 농구 교실, 쿠팡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힘든 현실을 버티어냈고 수시로 일본을 건너가 방법을 알아봤다. 마음속 간절함에 비해 일본팀 입단은 쉽지 않았다. 기량 유무를 떠나 2018~19시즌 이후 1군 경력이 없는 이유가 컸다. 국내 에이전트사에서는 그를 고객으로 받아주지 않았고 일본팀들 역시 최근 경력이 아예 없는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지만 박세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남들이 볼 때는 가비지타임에도 쉽게 나오지 못하는 그저 그런 백업센터일지 모르겠지만 누구보다도 농구를 좋아하고 목말랐던 상태인지라 어떤 식으로든지 코트를 다시 밟아보고 싶었다. 자존심, 주변의 시선 그런 것들은 진작에 내려놓았다. 스스로 여러팀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홍보했다.


어렵사리 일본 3부리그격인 가나자와 사무라이즈와 1년 계약에 성공했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연습생 신분이었다. 가나자와팀은 박세진의 성실함과 노력하는 자세에 높은 점수를 줬고 한달만에 다음 시즌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때문에 박세진은 돌아올 시즌에 모든 것을 다 걸 생각이다. 정말 간절하게 뛰고 싶었던 만큼 시즌이 끝난 후 팀에서 꼭 필요한 선수가 되겠다는 각오다.


그간 <농구人터뷰>에서는 단 한번도 현역 선수를 인터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세진의 진행형 인생 스토리는 정말 특별하고 간절했으며 무엇보다 비슷한 상황에 처했거나, 처할 수도 있는 다수의 무명 선수들에게 하나의 울림이 될 얘기라고 판단했다. 미국의 유명한 운동선수가 남긴 말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에.

◆ 박세진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5경기 출전, 평균 2.6득점, 1.9리바운드, 0.2어시스트, 0.2스틸, 0.1블록슛

⁕ 정규리그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8년 12월 22일 창원 LG전 = 11득점 / 어시스트 ☞ 2017년 2월 23일 안양 KGC전 = 2개 / 리바운드 ☞ 2017년 3월 10일 울산 모비스전 = 7개 / 스틸 ☞ 2018년 11월 14일 인천 전자랜드전 = 2개​ / 블록슛 ☞ 2017년 3월 7일 부산 KT전 = 3개
 

 

“농구에 목이 말라서 스스로 우물을 팠습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일본 현지 공개 트라이아웃을 통해 B3리그 카나자와 사무라이즈에 아시아쿼터로 입단했습니다. 어제 여행사 통해서 비자신청을 했으니 다음주(인터뷰는 한주 전에 이뤄졌다)에 일본에 갈 예정이고 현재는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 남는 시간을 모두 운동에 쏟고 있습니다. 모든 운동의 기본은 체력이잖아요. 그동안 운동량이 많지 않았던지라 매일같이 7km런닝을 하는 등 최대한 뛸 수 있는 몸을 만들어놓는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Q.일본행부터 이런저런 부분들을 거의 혼자 스스로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에이전트가 없어요. 아무래도 상무 전역 후 1군 기록이 없다 보니까 뭔가를 도움받기도 쉽지않네요. 갈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B1같은 곳에는 응시조차 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가 컸습니다. 국내리그에서도 유명하지 않은 저를 해외에서 알 리가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어필할 수 있는 기록까지 없다보니까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네요. 사실 평생 농구만 해온 제가 뭘 얼마나 알겠어요.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으면 정보도 빠르고 이런저런 부분에서 척척 진행이 될텐데 부재를 뼈아프게 경험했죠.

​​​​Q.카나자와팀은 스스로 루트를 찾아서 간것인가요?
그렇죠. 이전까지는 에이전트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줄 알았어요. 하지만 알아보니까 일본에서 에이전트를 허용할 뿐이지 꼭 끼고 해야 한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고요. 운동을 가르쳐주는 좋은 지인들의 도움도 받아가면서 스스로 찾아서 갔습니다. 전문 에이전트에는 많이 미치지 못하겠지만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정보도 취합하고 하다보니까 못할 것도 아니더라고요.

​​​​Q.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하는 상황이라서 신경쓸 것이 정말 많았겠네요.
아무래도요. 예전에는 운동하는 것외에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우리는 운동을 하고 저분들은 하실 일을 하는구나 정도였죠. 하지만 지금은 어떤 일이든지 그냥 되는 것은 없구나 하는 것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일의 종류만 다를 뿐 모두 필요한 일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네요. 무심코 넘어갔던 부분들도 다시금 되돌아보니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제가 국내에서 자리를 못찾고 일본까지 동분서주하지 않았다면 평생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Q.상무 입대 전에 가비지타임에서도 좋은 모습을 곧잘 보이고는 했는데 입대 후에는 너무 기회가 없었어요. 팬들 사이에서도 최소한의 기회도 못받는 것이 이해가 안간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잠깐이라도 실전을 뛰어봐야 제대로된 평가가 나오는 것 아닐까요?
그런 부분은 제가 관여할 영역이 아닌지라 할말이 없습니다. 감독님 성향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객관적으로 1군 전력이 아니다고 판단되었을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제가 조금이라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기회가 있었겠죠. 기량적으로 부족했던 탓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는 경쟁의 무대잖아요. 그런 것을 가지고 아쉽다 서운하다 등의 감정은 느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지난 크리스마스때 매니저 제의를 해주시는 등 KCC에서 챙겨주려고 했어요. 다른 팀에서 연락이 왔으면 그쪽으로 가고 아니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 정착하는 방향도 괜찮을것이다고 말해줬는데 정말 고맙더라고요. 마지막까지라도 챙겨줄려고 한거잖아요.

​​​​Q.전역후 1군 경험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노력했을 듯 싶어요.
그럼요. 저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다 그렇죠. 프로 1군은 증명의 자리인 만큼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다들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만큼 스포트라이트만 적을 뿐 D리그 경기도 정말 치열해요. (박)재현이형, (유)병훈이형 등 형들이 많은 동기부여를 해주셨어요. 형들도 출전기회가 많지않아 힘들었던 만큼 서로 동병상련의 마음도 있었는데 ‘세진아,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는 꼭 올 것이다.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잡지 못한다’며 흔들릴 때마다 잡아줬죠. 그렇게 의기충천해서 상무를 잡아냈던 경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혹자는 그들만의 리그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뛰고있는 선수들에게는 순간순간이 의미가 큽니다.

 


“간절함이 인연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Q.경기출전 유무와 별개로 이번 FA에 대한 기대는 있었을까요?

솔직히 조금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평균 신장이 올라갔어도 여전히 200cm 이상의 장신자는 드물거든요. 희소성에 희망을 걸었죠. 제가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으면 선수층이 얇거나 백업센터가 필요한 팀에서 연락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경기에 고픈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더라고요. 증명한 것이 없잖아요. 다만 몇 경기라도 뛰었으면 다른 팀에서도 저란 선수를 평가하는데 자료로 활용됐을텐데 아예 그런게 없으니 관심 목록에서 거론조차 안된거죠. 증명이 되어야 관심을 가지고, 경기를 뛰어야 증명할 기회가 생기는 건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인지라 불만을 가진다는 것은 안될 일이고 인정을 하고 받아들여야죠. 이렇게 하나씩 인생을 배우고 있는 듯 싶어요.

​​​​Q.달관한 듯 말하고 있지만 마음고생이 심했겠어요. 남들에게는 FA가 축제였으나 본인에게는 더 괴로웠을 수도 있으니까요.
괴로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혼도 했고 이제는 어린 나이도 아니고요. 힘들다고 징징댈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제가 쓸데없는 불만과 아쉬움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낭비같이 느껴졌습니다. 국내에서는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아시아쿼터라는게 있었고 비록 3부리그지만 일본에 가서라도 농구를 할 수 있게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김경석 코치님, (박)재현이형, (유)병훈이형 등과 대화를 많이 하면서 멘탈적으로도 더 단단해졌고 긍정적인 마인드나 그런 부분도 많이 배웠습니다. 종종 인생과 운전이 겹쳐서 느껴질 때가 많아요. 운전을 하다보면 비슷한 것 같아도 매번 다르거든요. 같은 길을 가더라도 신호등이 걸릴 때가 있고 안 걸릴 때가 있고 비슷한 풍경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뀌어있죠. 사고 등 돌발상황도 생길 수 있는 것을 비롯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속도 조절도 해야하잖아요. 나는 운전을 하고 있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계속 달려볼 각오입니다.

​​​​Q.냉정하게 말해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하면 매니저를 하는게 더 나을 수도 있겠죠?
그렇죠. 매니저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선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적인 면에서는 더 손해일 수 있거든요. 매니저같은 자리가 항상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요. 정작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서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농구를 늦게 시작한 것치고는 나름 열심히 해서 1부대학, 국가대표, 프로팀 등을 차례로 거쳐왔는데 여기서 끝내버리면 도망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거에요. 다들 아시다시피 프로에서 별반 보여준 것도 없는 그저그런 백업센터에 불과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코트에서 불태우고 싶어요. 그렇게까지 해도 잘 안된다면 그게 한계인 것이고 나중에 여한이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그만한 능력도 없으면서 ‘아! 내가 기회만 좀 있었어도 더 잘했을텐데’라는 착각 속에서 평생을 살 수는 없잖아요.(웃음)

​​​​Q.일본 진출은 언제부터 생각하고 있었나요?
어느 팀으로도 가기 힘들겠다고 느낄 때부터 막연하게 트라이아웃 등을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는게 거의 없어서 막막하기만 했죠. FA시장이 끝난 상태에서도 제가 운동을 계속하고 있자 어떤 분이 ‘너, 일본 준비하냐?’라고 물어왔는데 외려 ‘거기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반문했을 정도니까요. 물론 그분도 대답을 못하더라고요. 대한민국 농구인중 일본농구나 아시아쿼터를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제막 시작됐고 그런 만큼 거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죠. 그나마 에이전트가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마저도 없으니 많이 답답하더라고요.

 


​​​​Q.그러게요. 답답하셨을 듯 싶네요.
사실 예전부터 일본리그에 대해 혹시 하는 생각으로 담아두기는 했었어요. 타일러 가틀린이 KCC D리그 코치로 계실 때 나름 친하게 지냈었거든요. 당시 코치님을 통해 미국농구를 비롯 다양한 해외농구 이야기를 듣고는 했죠. 재미있고 신기하더라고요. 그러던중 가틀린 코치님이 지난 시즌 B.리그 교토 한나리즈 코치로 계셔서 연락을 했어요. 워크아웃이라도 가능하겠냐고 부탁드렸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시즌 중이고 FA시장도 끝나지 않았다면서 난색을 표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라이트라는 필리핀 가드와 재계약을 하더라고요. 아, 저런 이유였구나 하고 알게 됐죠. 이후 코치님이 B3.리그 도쿄 하치오지 비 트레인스에 감독으로 가시게 됐는데 연락해서 저를 데려가 주면 안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어디에 있던지간에 농구가 고팠으니까요.

​​​​Q.그곳으로 가지 않은 것을 보니 잘 안된거죠?
맞습니다. 일본에는 귀화선수제도가 있는데 한국에 비해 상당히 간결해요. 국내같은 경우 라건아 한명 귀화선수 만들려고 엄청 애썼잖아요. 그렇게 노력한 후 더 이상 다른 선수는 나오지 않고 있고요. 문태종 아들이 물망에 오르고는 있지만 확실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잖아요.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운데 일본은 달라요. 5년 동안 일본에 거주하게 되면 쉽게 귀화가 진행된다고 하더라고요. 나이지리아, 세네갈 등 아프리카 어린 친구들이 초등학교때 많이들 온다고하던데 그렇게 되면 5년이 금세 지나가잖아요. 그러다보니 일본에는 귀화선수가 상당히 많아요. 하지만 규칙상 각팀은 아시아쿼터와 귀화선수제도중 하나만 쓸 수 있어요. 아쉽게도 도쿄 하치오지를 비롯 알아보던 다른팀 한곳까지 모두 귀화선수가 있었습니다. 제 실력을 떠나서 테스트해볼 여건조차 막혀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일본으로 날아갔습니다.

​​​​Q.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으로 갔다고요?
일단 저에게는 동기부여가 중요했습니다. 안되는구나하고 한국에서 푸념만 하고 있는 것보다 직접 일본에 가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게 낫다고 판단했죠. 일본같은 경우 특별한 경우 빼고는 대부분이 1년 계약이에요. 해당 구단을 비롯 이런저런 팀들을 돌아다니며 얼굴도장이라도 찍어놓으면 시즌 중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혹은 내년에라도 저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었어요. 정말 간절했기 때문에 최대한 경우의 수를 많이 만들어 놓는게 중요했습니다. 답이 안보이기는 하지만 투자를 하고 씨를 뿌려야죠. 가만히 앉아서 누가 떡을 먹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일본 현지로 가면 갈수록 문이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갈때마다 정보 몇개라도 알게 되고 익숙한 얼굴도 만들게 되니까요. 더불어 좋은 인연도 맺게되었는데 KBL무대에서 코치로 활동한바있는 톰 위즈먼이 바로 그분입니다.

​​​​Q.톰 위즈먼이라고하면 초창기 나래에 있던 외국인 코치를 말하는 것인가요?
맞아요. 최명룡 감독님이 제 대학교때 은사님이세요. 그분이 원주 나래팀에 계실 때 위즈먼 코치와 함께 일했고 이후에도 꾸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좋은 관계를 이어가신 것 같더라고요. 위즈먼이라는 분은 특히 일본에서 생활을 많이 하셨는데 이제는 농구계에서 꽤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셨어요. 최감독님께서 연결을 해주셔서 그분도 일본에서 만나게 됐죠. 위즈먼이라는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여전히 최감독이 그립고 좋은 친구로 생각한다고. 때문에 저에게도 무척 잘해주셨습니다. 본인의 집까지 데려가 주셨고 식사도 함께 했어요. 도쿄 Z라는 팀에 저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었고요. 정말 너무너무 고맙죠. 문제는 저의 경기 기록이 너무 없다는 것이었죠. 앞서도 말했듯이 전역 후에는 1군 기록이 전무하니까요. 경력 단절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네요. 결국 그런 문제로 인해 해당팀에서도 귀화선수를 선택하게 되죠.

​​​​Q.여러가지로 상황이 막혀있었네요.
가틀린 코치님은 저를 챙겨주려고 계속 노력하셨어요. 코치님과 감독님중 무엇으로 불러야 하나 싶지만 저에게 익숙한 호칭은 코치님이니까 그것으로 계속 부를께요. 가나자와에서 트라이아웃을 한다는 것을 알려준게 바로 그분이세요. 코치님 덕분에 해외농구에 대해 알게되었고 일본 시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됐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조금씩 물어보면서 약간이나마 정보의 폭을 넓혀나갈 수 있었고요. KCC에 있으면서 좋은 인연을 많이 얻었는데 코치님도 그중 한분이십니다.
 


“외국어요? 저에게는 생존의 회화입니다”

​​​​Q.트라이아웃의 개념이 궁금합니다. B리그 전체적으로 진행되고 필요한 선수를 선택하는 것인가요? 아님 팀마다 따로따로 진행하나요?

전체적으로 하는 것도 있기는 해요. 팀 자체적으로도 하고요. 주로 트라이아웃은 3부리그에서 많이 합니다. 1부리그같은 경우 필요한 선수가 있으면 트레이드나 FA영입을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2, 3부에서 쓸만한 선수를 끌어올리는 방식을 많이 쓰거든요. 2부 역시 3부에서 콜업을 자주 하고요. 반면 3부같은 경우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트라이아웃을 통해 선수모집을 하는 것이죠. 트라이아웃을 찾아서 이런저런 팀을 돌아다니며 원서도 내고 하다가 알게된 사실이에요. 트라이아웃이 주로 3부리그에서 많다는 것을요.

​​​​Q.과정은 복잡하지 않았나요?
지금와서 보면 크게 복잡할 것도 없었지만 일단 저는 외국인인데다가 사전에 정보가 거의 없었던지라 아주 작은 것 하나도 어렵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죠. 일단 잘 모르니까요. 신청서 양식을 작성해서 접수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문의를 했는지 몰라요. 계속 물어보고 이해가 안되는 것은 다시 알아보고 반복의 연속이었죠.

​​​​Q.일본을 오가느라 돈도 꽤 쓰셨을 듯 싶어요?
그렇죠. 누군가에게는 큰돈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습니다. 6월부터는 월급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지금까지 모아왔던 적금을 깰 수밖에 없었죠. 7월 말에서 8월초 정도까지 데드라인을 정하고 그래도 안된다면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행히 7월 28일경에 가나자와에서 연락이 와서 마지막 날에 넘어가게 됩니다. 돈도 떨어져 가고 다시 또 허탕을 치게되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3개월 동안 7번을 오갔는데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겠더라고요. 가나자와에서는 연습생을 뽑는다고 했습니다. 일단 연습생으로 팀과 함께해보고 나중에 다시 얘기를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한마디로 특별할 것 없는 테스트였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것이라도 고마웠습니다. 방식을 떠나 어떤 기회를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 간절한 상태였으니까요. 그렇게 한달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8월 23일에 정식계약을 하게 됩니다. 아직은 농구를 끝낼 운명은 아닌가 보다 싶었습니다.(웃음)

​​​​Q.연습생으로 한달 정도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돈이 지급됐나요?
아뇨.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정식계약을 체결한 상태도 아니었고 심정적으로 아쉬운 쪽은 저였으니까요. 제 돈을 써가면서 버티었죠. 대신 기숙사에서 잠을 재워주는 것은 고맙더라고요. 일본이 한국과 비교해서도 숙박비가 꽤 비싼 편이에요. 그전에 왔다갔다 할 때도 가장 부담스러운 것 중 하나가 숙박비였거든요. 그것이 빠진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했습니다.

​​​​Q.그나저나 일본어는 할줄 아나요?
아니요. 배워야죠. 5월에 스피드 일본어라고 아주 기초적인 것만 조금 공부하기는 했는데 인사만 주고받는 수준인지라 의사소통까지는 어렵습니다. 대신 잘하지는 못하지만 영어를 조금 하는데 다행히 코치님을 비롯한 몇몇이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어느 정도 소통은 하고 있습니다. 따로 영어를 공부하면서 배우지는 않았고요. 생활영어라고 할까요? 외국인선수나 코치님 등과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늘게된 부분도 많습니다. 물론 그때는 제가 일본리그에 아시아쿼터 선수로 갈 것이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조금이라도 익혀놓은게 이럴 때 또 도움이 되네요. 정말이지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뭐라도 항상 준비를 해야겠다는 교훈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외국도 왔다갔다하면서 최근에 영어가 더 늘었어요. 뭐랄까. 살아야하잖아요. 생활 영어를 넘어서 생존 영어까지 넘어가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Q.일본어 역시 생존을 위해서 배워야겠네요?

아마도요. 팀이 있는 곳은 오사카 공항에서도 기차로 6시간을 타고 가야 되는 곳인데 그것도 3번을 갈아타야 되요. 한국으로 비교해 보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가 않네요. 외국인을 보기가 쉽지않고 그런 관계로 한국인은 더더욱 찾아보기 쉽지않을거에요. 그러다보니 영어를 하는 이들도 많지 않아요. 대부분이 그냥 일본어만해요. 쌩으로 일본어 회화를 듣는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그냥 일본어가 표창처럼 날아들어 몸에 푹푹 꽂혀요. 어쩌겠어요. 일본이니까, 일본팀이니까 일본어를 쓰는 것은 당연한거고. 영어를 써준다면 고맙기는 하지만 그 부분은 제가 불만으로 여길 수 없잖아요. 다행히 제가 고향이 부산이에요. 부산 사투리가 억양이나 그런 부분에서 일본어와 꽤 흡사하더라고요. 더불어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 중에서 일본어가 섞여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일본어중에서도 알아들을만한 단어가 꽤 있더라고요. 무조건 팀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영어때 그랬던 것처럼 생존 일본어 독하게 해야죠. 언어뿐만이겠어요. 처음해보는 일본 생활인데 많은 부분에서 한국에 있을 때와는 다를 것이다고 각오하고 있습니다. 불편함에 빨리 익숙해져야죠.

“농구요? 제 인생의 목적이자 마음의 소리입니다”

​​​​Q.팀에서 너는 이런 부분이 장점이다고 말한 것이 있을까요?

커뮤니케이션에 장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름 계속 신경쓰고 있는 부분인데 팀에서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고 더 힘도 생깁니다. 농구는 단체 스포츠이니까 팀워크 그런 부분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플레이적인 측면을 말하면 저희 팀에 단신(180cm) 우크라이나 가드가 한명 있거든요. 보통의 일본팀같은 경우 200cm 안팎의 장신자들로 외국인선수 3명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점에서 키작은 외국인가드가 뛰고 있다는 것은 조금 신선하기는 하죠. 어쨌든 그로인해 장신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제가 나타났으니 한번 지켜보자라고 샹황이 흘러간 듯 싶어요.

​​​​Q.국내에 있을 때부터 파워만큼은 외국인빅맨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일본에서도 기대해도 될까요?
어렵게 일본까지 간 이상 일단 저의 플레이적인 부분에서는 말을 아끼고 싶습니다. 국내에서 선택을 못받아 먼 곳까지 가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저는 무엇이 장점이고 어떤 플레이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아요. 향후 코트에서 제가 증명해 보일 부분이고 누군가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되면 대신 말씀해주시겠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고요. 얼마를 뛰더라도 온 힘을 다해 플레이할 것이며 실책 등 엉뚱한짓 안하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Q.말을 듣다보니 일본은 정말 지역별로 농구팀이 잘 짜여져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맞아요. 국내 기준으로 보면 2부, 3부리그하면 1부리그로 가기 위한 대기팀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에요. 각자 본인의 지역 이름을 걸고 뛰는지라 3부리그도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잘해도 충분히 지역 내에서 스타가 될 수 있고 활약에 따라서는 전국에 이름을 알리는 것도 가능하겠더라고요. 지역별로 연고지팀에 대한 애정도 크고 해당팀에 대한 다양한 활용을 통해 윈윈하는 시스템이 무척 발전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1년 계약에 승강제를 쓰고 있는지라 매시즌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고 선수들간 동기부여도 확실하더라고요. 지금은 무명이라도 해당 시즌에서 인상적인 모습만 보여도 얼마든지 이름을 알릴 수 있으니까요.

​​​​Q.이번 시즌 받게 될 연봉이 궁금합니다.
아, 저요? 일단 일본에서는 연봉협상과 체결 등이 대부분 비공개로 되어있습니다. 특별한 선수 몇몇을 빼면 밝히지를 않아요. 1부리그같은 경우 국내보다 약간 더 많다고 보면 되고요. 2부는 1부보다 절반 수준 그리고 3부는 한참 못 미치겠죠. 3부 선수 중에는 아르바이트를 뛰는 선수도 적지 않다고 들었어요. KBL 최저수준보다 나을게 없다고 보시면 맞을겁니다. 하지만 정확한 금액에 대해서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한국같은 경우 모기업의 지원을 받아서 운영되지만 여기는 각자가 비즈니스를 통해 장사를 하는 시스템이라 공개여부에 대해 예민할 수밖에 없는 듯 싶습니다.

 


​​​​Q.이전까지는 취미로 즐기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후회도 있을까요?
아무래도 성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학창 시절의 1년은 성인 시절보다 더 큰 것이 사실이죠. 기본기는 어릴 때 잘 배워 놓아야 성인 되어서도 탄탄하다는 말도 있잖아요. 중학교 때는 취미 정도로 농구를 했어요. 지금처럼 활성화되지는 않았으나 3x3농구대회도 종종 나가면서 말 그대로 즐겼죠. 그러던 중에도 장래에 대한 고민이 컸어요. 신체조건도 그렇고 농구선수의 길을 가는게 좋겠다는 주변의 의견도 많았고 3학년때 마음을 굳히게 됐습니다. 그렇게 모 학교를 찾아갔는데 농구를 하려면 1년 유급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하면서도 선뜻 내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다른 고등학교에서는 그냥 오라고 해서 그곳으로 진학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농구선수의 길에 대한 관심은 많았어요. 하지만 부모님께서 반대를 하셨습니다. ‘운동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는 이유가 가장 컸어요. 저희 집안에 큰사람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운동으로 대성한 케이스가 없거든요. 롤모델이 되어줘야 할 분들이 다 잘 안 풀렸어요. 하다가 그만두고 도망가고 실력적으로 뒤처지고…, 그런 것을 보시면서 운동 쪽은 아닌가보다 싶으셨던 거죠. 아들이 공부에 더 집중하기를 원한 부분도 영향을 끼쳤고요.

​​​​Q.결혼은 언제 하신 것인가요? 신혼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하핫…, 그렇게 보였다면 감사합니다. 사귄 기간은 꽤 길었고 결혼은 작년에 했습니다. 결혼을 하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고 시간도 많이 투자되잖아요. 아내와 상의하에 FA 1년 전에 결혼을 마쳤어요. FA를 남겨놓고 1년 정도는 죽어라고 달릴 생각으로요. 물론 결과는 아쉽게되었지만 무슨 일을 하든 준비를 꼼꼼히 하고 최선을 다해 달려보자는게 신념입니다. 결과야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지만 노력은 과정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이렇게 일본무대에 도전할 수 있는 것도 아내의 내조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래저래 본인도 힘들텐데 남편의 꿈을 위해서 오히려 응원해주고 있어요. 눈물나도록 고맙고 미안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된 것도 큰 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내를 위해서도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죠.

​​​​Q.정말 농구에 대한 갈증이 많으신 듯 해요. 쌓아놓은 커리어도 소박하고, FA시장에서도 외면당하고…, 보통의 선수같으면 구태여 일본 3부리그까지 연습생으로 찾아가지 않을 것이란 말이에요.
맞습니다.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질기게 농구선수 생활을 이어가려고 하지 않죠. 다른 일을 찾아보는게 경제적으로도 더 낫고 구태여 농구가 하고 싶으면 3x3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3x3측에서도 연락이 많이 왔어요. 하지만 은퇴하고 3x3선수로 출전하는 것을 아직 가슴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거에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게 되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맨땅에 헤딩을 해가면서 일본리그의 문을 두드렸죠. 그것조차도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친구가 ‘우리 집에 장난감있는데 놀러올래?’라고 해서 갔는데 장난감이 없거나, 있어도 말한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나는거에요. 뭐야? 거짓말한거야. 실망감이 밀려오면서 신뢰가 와르르 깨지는 거죠죠. 저 역시 어떻게될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최대한 과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찌됐든 입단을 할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인터뷰에서 말씀이라도 드릴 수 있는 거잖아요. 실컷 주변에 다 알려놓고 최종적으로 입단에 실패하게되면 저는 저대로 상처받고 주변에서도 실없는 사람되는게 싫었습니다.

​​​​Q.한준영에서 박세진으로 개명을 했잖아요. 지금도 한준영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는 이들도 적지않은데 개명 여부를 떠나서 성까지 바꾼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음…, 솔직히 예민한 부분이기는 합니다. 일단 제 의지와는 무관한 부분이고요. 그 과정에서 제 잘못도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한씨고, 어머님께서 박씨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서 어머님성을 따르게된거죠.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사인지라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께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박세진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 밖에 없을 듯 싶어요.

​​​​Q.마지막 질문입니다. 박세진에게 농구란 무엇일까요?
인생의 목적같아요. 뿌리를 농구로 시작했기 때문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 열심히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햇빛도 쐬고, 치열하게 막 그러고 있죠.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러기에 모든 것을 올인하고 있죠. 혹자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러기에는 커리어나 기타 등등에서 너무 부족한 것 아니냐고요. 선수가 되었든 상황이 되었든 무엇인가와 비교하고 싶지는 않아요. 특정 대상보다 더 잘되려고 혹은 뛰어넘고 싶어서 농구를 하는게 아니니까요. 제 마음에서 시키는 데로 후회없이 열심히 뛰어보는게 목표이고 꿈입니다. 그 뒤 결과야 저의 재능의 크기만큼 혹은 노력 한만큼 나오겠죠. 현재 저의 농구에는 희노애락이 다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제공, 박상혁 기자,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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