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에 담은 한과 그리움, 4·3 예술로 되살아나다

허호준 2023. 9.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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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임흥순 개인전 ‘기억 샤워 바다’
뜨개 132점 활용한 작품 ‘등대’ 등
고 김동일 할머니 유품 2천여점 전시
임흥순 작가. 허호준 기자

지긋지긋한 섬이 싫었다. 섬은 삶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도 싫었다. 4·3을 겪은 많은 제주 사람이 그러하듯 김동일(1932~2017) 할머니도 1958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평생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 그곳에 묻혔다.

제주 조천중학원 2학년인 16살 때 겪은 4·3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꿈많던 그 시절 그는 지서에 끌려간 같은 학교 학생회장이 1948년 3월 고문치사 당하자 동료 학생들과 함께 항의하고 저항했다. 뒤이어 4·3이 일어나고 무장대의 말단 연락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그해 11월 산에 올랐다가 토벌이 강화되자 내려오지 못했다. 5개월 남짓 한라산의 이름 모를 동굴을 옮겨 다니며 숨어지내다 1949년 초 토벌대에 체포돼 10대의 어린 나이에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뒤 광주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던 그는 전남 진도에 있다가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다시 체포돼 잠시 수감됐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지난 16일 제주4·3평화공원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한 임흥순 작가의 개인전 ‘기억 샤워 바다’, 허호준 기자

그러나 고향에서 반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자 다시 고향을 떠나 전남 목포의 친척 집에 있다가 1958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 도쿄에서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며 살던 그는 4·3 60주년인 2008년 한국을 떠난 지 50년 만에 고향 땅을 밟고 부모의 묘소 앞에서 통곡했다.

고인이 된 그가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 제주4·3평화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지난 16일 개막된 영화감독이자 시각예술작가인 임흥순 작가의 개인전 ‘기억 샤워 바다’가 그것이다.

일본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면서 어릴 때 겪은 4·3, 고향의 부모, 친구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뜨개질에 매달렸다. 그것은 기억으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했다.

임 작가는 2015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아티스트 파일 2015: 동행’ 전시를 준비하며 그를 처음 만났다. 도쿄의 집을 방문했던 임 감독은 “집안이 온통 정리되지 않은 물건과 옷으로 쌓여 있었다. 감당할 수 없었던 경험과 기억들이 흐트러져 있고, 정리할 수 없는 역사를 쌓아놓은,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임흥순 작가가 지난 16일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개막한 개인전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임 작가는 유족의 동의를 얻어 2017년 그가 남긴 2천여점의 유품을 한국으로 가져왔고, 그해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전시에서 유품들을 소개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유품만도 그가 갖고 있던 옷 1500여벌과 뜨개 200여점 등 2천여점이다. 옷도 2천여벌에서 추려냈다. 옷은 본인이 산 것도 있지만 대부분 동네 주민들이 기증한 것이다. 그는 생전에 4·3 때 희생된 이들의 삶을 기리기 위해 한라산에 해바라기를 심고 위령비를 세우고 싶다고 했다. 그의 옷에도, 뜨개에도 해바라기가 있다.

일본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가 이처럼 많은 옷을 수집하고 뜨개질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일대기를 추적해 ‘자유를 찾아서-김동일의 억새와 해바라기의 세월’을 쓴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은 “옷은 동네 주민들이 기증한 것이 많지만, 할머니는 도시락가게를 운영하면서 일하다가도 틈만 나면 뜨개질을 했다”며 “자기 마음을 추스르며 평생 뜨개질을 했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임 작가는 “멋쟁이 할머니로 일본에서 멸시받지 않으려는 노력이었고,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고자 한시도 쉬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석했다.

지난 16일 제주4·3평화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한 임흥순 작가의 ‘기억 샤워 바다’. 허호준 기자

개막식은 ‘해바라기와 선착장 2023 김동일 컬렉션’ 퍼포먼스로 시작됐다. 참여자들이 직접 고른 할머니의 옷을 입고 무대 위를 걷는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는 11월12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실 로비의 천장에는 하늘을 배경으로 그가 남긴 다양한 색깔, 다양한 크기의 뜨개 132점을 활용한 ‘등대’가 내걸렸다. 어두운 바다를 비춰 길을 밝히듯 격랑의 시대를 살다간 그의 삶을 뜨개에 엮인 기억을 통해 빛 그림자로 로비 공간을 비추게 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제1전시관에는 임 작가의 신작 영상 ‘바다’가 상영된다. 난민이자 분단의 디아스포라(이산)로 겪어야 했던 다양한 재일동포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과 축구선수 안영학 등을 만날 수 있다. 제2전시관 ‘옷의 바다’에서는 제주와 서울, 일본 오사카 등에서 열린 유품 나눔 워크숍 ‘고치글라 Run with me’ 참여자들의 소감과 할머니의 옷을 각자의 방식으로 수선, 재창작한 결과물 등을 사진, 텍스트, 영상 등으로 보게 된다. 제3전시관 ‘말의 바다’에서는 제주의 평화활동가, 생태관찰자, 대안적 생활자의 삶과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지난 16일 제주4·3평화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한 임흥순 작가의 ‘기억 샤워 바다’ 전시된 고 김동일씨의 생전 유품들. 허호준 기자

고희범 4·3평화재단 이사장은 “원색의 다양한 옷을 왜 입고 다녔는지 보는 이들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할머니의 설움과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총괄 기획한 안혜경 아트스페이스·씨 관장은 “죽어서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할머니를 생각하며 제사 모시듯 정성스럽게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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