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글이 되는 음악] 콘텐츠 시대에서 브랜드 시대로의 진화 밴드티 르네상스

김작가 2023. 9. 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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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은 성수동에 가면 밴드티를 입고 다니는 20대들이 많이 보인다. 건스앤로지스, 에이씨디씨, 너바나 같은 유명 밴드들의 티다. 다시 록이 돌아오는 건가 싶었지만 트렌드에 정통한 친구는 이랬다. “형, 쟤들은 에이씨디씨가 누군지도 모를걸요.” 그 ‘간지’ 나는 디자인과 브랜드를 소비할 뿐, 음악으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나는 밴드티를 제외하고서는 여름옷을 산 적이 없다. 내한 공연이나 페스티벌에서 파는 투어 한정 머천다이즈(merchandise)를 음반처럼 사 모았던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밴드티는 여름의 유니폼이 됐다. 사진을 찍히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가면 어떤 밴드티를 입을지 고민하는 게 일이었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기획 및 자문위원

패션에 있어서 자기 스타일을 갖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특히 남자의 입장에서 더욱 그런데, 상의를 보자면 대부분 흰색 무지 티 위에 꽈배기 니트를 입는다거나 브이넥 셔츠에 카키색 ‘야상’을 걸친다. 바지는 너나없이 스키니, 혹은 슬림핏의 청바지나 단색 면바지가 주를 이룬다. 헤어스타일과 신발 등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음악으로 치자면 흔해 빠진 ‘달달’한 싱어송라이터 스타일이랄까. 툭 까놓고 말하자면, 여자들에게 무난하게 인기 끌 수 있는 스타일인 것이다. 어쨌든 시대를 막론하고 ‘댄디’한 남자는 여대생들의 소개팅 희망 1순위니 말이다. 뭐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질투에 가깝다. 적어도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즉 반팔을 입는 계절에 한정하자면 나는 결코 그런 댄디함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주적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밴드 티셔츠다.

보통 옷을 살 때는 디자인과 소재, ‘핏감’을 고려하지만 밴드티는 그런 원칙이 통하지 않는다. 프린트 디자인과 프린트 디자인, 그리고 프린트 디자인, 그게 전부다. 몇 가지 전제 조건은 있다. 미국 밴드의 경우 평소 입는 사이즈보다 한 사이즈 정도 줄여서, 영국과 일본은 평소 사이즈에 맞춰서 사면 된다는 사실만 알아두면 된다. 그다음은 색상, 90% 이상의 밴드티는 검은색으로 제작된다. 블랙이 기본이고 다른 옵션이 있으면 다행인데, 메탈이나 하드코어 등 ‘빡센’ 장르는 닥치고 블랙만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나의 밴드티 역시 블랙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데, 진작에 질렸다. 이제는 웬만큼 좋아하는 밴드가 아니고서는 티셔츠를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 아닌 장점이 생겼다. 그러나 음반 산업이 쇠퇴하고, 음원 산업의 규모가 음반의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지 않는 이 시대에 공연은 음악 산업의 헤게모니를 차지한다. 그에 따른 부가가치, 즉 티셔츠를 비롯한 머천다이즈의 중요성도 커졌다. 예전처럼 블랙과 화이트만으로는 시장의 요구를 채울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최근 몇 년 사이 밴드티의 컬러는 놀랍도록 다양해졌고 나의 ‘행거’는 마치 드림 콘서트의 아이돌 팬클럽 풍선 색만큼이나 다양한 색깔의 티셔츠가 걸려 있게 되었다. 물론, 블랙 앤드 화이트 시대의 끝물에 잠시 현상 유지됐던 지갑 역시 다시 얇아지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게 있다. 제조국. 한때는 중국에서 거의 모든 밴드티를 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실로 다양한 나라에서 밴드티를 만든다. 이는 섬유 산업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일 테지만 다행히 본지가 섬유 업계 소식지는 아니니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보통 밴드티의 주된 제조국은 중국, 필리핀, 온두라스다(가끔 캄보디아산이 걸릴 때도 있는데 열외로 해도 좋을 만큼 형편없는 품질을 자랑한다. 캄보디아산 밴드티를 샀다면 주저 없이 소장품 목록에 넣거나 한 번 입고 버릴 각오를 하기 바란다). 이 셋 중 중국산과 필리핀산이 양호하고, 온두라스산은 복불복이다. 혼방인 경우 몇 번만 빨아도 보푸라기가 일기 일쑤고, 이른 목 늘어남을 막기 위해 입고 벗을 때 꽤 긴장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산과 필리핀산은 대부분 ‘평타’는 친다. 이건 어디 가서 나오지도 않는다. 오직 경험의 소산이다.

‘이 옷이 요즘 제일 잘나가요’라는 점원의 말에 혹하는 사람이면 모르겠으나, 필자의 경우 그런 옷은 절대 사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같은 옷을 입은 이를 마주칠 때의 곤란함이란! 밴드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제이슨 므라즈, 뮤즈 등 한국에 팬도 많고 자주 오는 뮤지션의 티는 없다. 메탈리카 등 ‘짝퉁’이 넘쳐나는 밴드 역시 마찬가지다. 머천다이즈 판매량이 그리 많지 않은 한국이다 보니, 2000석 정도 규모의 공연장에 내한했던 밴드의 티를 입고 다니면 사실상 평생 그 티를 입은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다고 해도 좋다. 글래스톤베리, 코첼라, 서머소닉 같은 해외 페스티벌 티는 ‘록부심’을 한껏 부릴 수 있는 아이템이다. 그중 으뜸은 페스티벌이건 ‘단공’이건 해외에서 직관한 밴드의 티셔츠. 특히 한국에 온 적 없다면 뭐랄까, 베이징에 가서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들여온 조선의 사신이라도 된 기분은 그저 한 ‘덕후’의 착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픽시즈, 아케이드 파이어, 콜드플레이의 티셔츠를 입고 다녀봤자 거리의 사람들은 한낱 보세 티 정도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밴드티의 가격이 원화로 평균 3만5000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눈시울이 촉촉해진다(물론 요즘 성수동 청년들이 입는 티는 훨씬 비싸다. 빈티지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패션과는 일말의 공통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밴드티는 휴가철의 군복과 같은 존재다. 아무리 밤새 전투화에 물광을 내고, 전투복에 빳빳이 줄을 세워도 서울역에서 마주치는 다른 부대 군인들이나 관심을 보일 뿐 민간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군바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본 적 없는 밴드티를 보면 부러움과 더불어 강력한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괜히 가서 말이라도 걸고 싶어진다. 산책하다 만나는 애견인의 대화처럼 가볍지만, 반가운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취향의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티셔츠는 가장 개인적인 정치적 선언이라고 누가 그랬다.

콘텐츠의 시대에서 브랜드의 시대로 진화했다. 단순히 패션 브랜드뿐만 아니라 인기 있는 힙한 상품 로고를 넘어 앞서 명밴드들의 로고도 브랜드로 소비된다. 트렌드에 둔감한 나는, 지금 성수동에 넘쳐나는 밴드티를 보며 조금은 기쁘다. 옷장에 박혀 있는 오아시스 첫 내한 티, 미국에서 사 온 롤링스톤즈 투어 티셔츠 같은 케케묵은 아이템들을 입고 성수동을 활보한다면 어떨까. 같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젊은이를 마주친다면 과거와는 다른 연대감을 느낄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의 마음은 나와 다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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