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과학사] 대화재 경고 무시한 日관료·학계...재난과학자들 “간토 지진, 사실상 인재였다”
전체 사망자 중 87% 화재로 희생
1905년 경고 나왔으나 무시
목조건물 다수, 인구밀집 지역 위험 커져
불 소용돌이가 시내 곳곳 집어삼켜
도덕 규범 무너지며 화재 무관하게 무정부 상태서 자행된 폭력에 수천 명 숨져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도와 가나가와현 등 간토(關東) 일대에 규모 7.9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10만5000여명이 숨지거나 행방불명됐다. 간토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지진은 가장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자연재해 사례로 꼽히고 있다. 2011년 일본을 강타한 규모 9.1의 동일본 대지진(도호쿠 지진), 1944년 규모 8.2 도난카이 지진, 1946년 규모 8.0 난카이 지진보다 규모가 작지만 훨씬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미국과 일본, 홍콩 연구자들이 최근 간토대지진 100년을 맞아 당시 문헌과 논문들을 다시 분석해 조사에서 화재의 영향이 지나치게 간과됐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당시 화재로 사망자 대부분이 나왔는데도 분석의 초점이 지진에 집중되고 있어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연구진은 지진과 화재에 따른 대혼란의 결과로 폭력이 발생하면서 수천 명이 사망했다며 간토 대학살이 실제로 벌어졌음을 인정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와 일본 교토대와 도쿄국제기독교대, 홍콩대 연구진은 이달 12일(현지 시각) 미국 지진학회보에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발표한 특집 논문에서 “간토 지진에 따른 화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화재 사망자를 발생시켰고 위험이 사전에 나왔지만 위험을 줄이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며 이 같은 분석 내용을 공개했다.
◇규모 7.9 지진...곳곳 화재 확산하며 46시간 동안 도쿄 43% 불타
연구진에 따르면 1일 오전 11시58분 요코하마 남쪽에서 발생한 규모 7.9 지진이 도쿄 중심부를 강타했을 때 이 지역에 사는 대부분 시민은 가족과 점심 식사를 앞준비하고 있었다. 강한 지진 진동이 내륙을 타고 전달되면서 도쿄와 요코하마 등 도쿄만 일대 목조 건물이 무너지면서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처음에는 국지적으로 발생했다. 불은 즉시 꺼지지 않고 대부분 다른 불길과 합쳐져 더 거세졌고 초속 7.6m 강한 바람이 불면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거대한 불 토네이도가 형성됐다. 이 불 폭풍이 사람들이 피해 있던 피난처 목조건물들을 휩쓸면서 희생자들의 규모는 더 커졌다. 1일 발생한 불은 같은 달 3일 오전 10시에서야 진화됐는데 도쿄 지역의 43%를 불태운 것으로 분석됐다.
최근 계산에 따르면 화재로 인한 손실액은 총 15억엔에 육박한다. 1923년 당시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45엔의 3분의 1, 당시 정부 예산 13억7000만엔을 훨씬 넘어서는 액수다.
간토대지진 사망자는 조사마다 달라 10만~14만명에 이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숨진 사망자 11만명에 육박하는 수치다. 연구진은 도쿄와 주변 지역에서 숨진 사망자가 10만5000명이 유력하며 이 가운데 90%가 며칠간 화재로 숨졌다고 분석했다. 지진 진동으로 무너진 건물에 깔리거나 땅이 액상화하면서 지반이 무너져 숨진 희생자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
연구진은 이런 특성은 일반 지진 피해와는 다른 결과라고 봤다. 세계은행은 대부분의 지진 관련 부상 및 사망은 벽이 무너지고, 유리가 날아가고, 땅이 흔들리면서 물체가 떨어지는 결과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그러나 간토대지진의 실질적 피해가 화재에서 발생했지만 관련 기록과 문헌 중 5% 미만이 화재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이 사건을 간토대지진 참사라는 일반적인 이름 대신 ‘간토대화재’ 참사로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간토 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화재가 도쿄를 파괴할 것이란 예측은 대지진이 있기 훨씬 전 제기된 적이 있다. 1905년 도쿄제국대 지진학과 조교수이던 이마무라 아키스네는 간토 지역에서 ‘지진 공백’에 따른 화산 폭발을 예견했다. 이마무라 교수는 “간토 지역이 장기간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지진 공백이 있어 대규모 지진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된다”며 “도쿄 시민들이 지진에 따른 화재로부터 대피할 곳이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또 화재 위험을 줄이기 위해 등유 랜턴을 폐지하고 신축 건물 사이에 간격을 두는 등의 조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경고는 도쿄 시민들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정부와 학계의 외면을 받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진학자인 후사키치 오모리 도쿄제국대 교수 겸 일본 지진조사위원회장도 “지진 공백 이론을 믿기 어려우며 폭풍이나 바람이 부는 날씨에는 지진이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화재가 확산할 만큼 바람이 불지 않을 것”이라며 무시했다.
당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며 급격히 성장하던 도쿄는 지진과 대화재에 따른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조건이 충분히 무르익은 상황이었다. 도쿄 인구는 1900년 112만명에서 1922년 240만명으로 늘었다. 주변 지역 역시 같은 기간 동안 인구가 38만명에서 118만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이 지역 인구 69%가 이전 지진에서 심각한 피해를 본 지역에 살고 있었다. 도시의 건물 35만6975채 중 91%, 다리 592개 중 58%가 지진에 취약한 목재로 지어졌다는 점도 막대한 피해로 이어지기 충분했다.
◇ 14초 짧은 지진 진동, 1시간 동안 98건 화재가 결국 도시 집어삼켜
하지만 위험을 줄이기 위한 사전 예방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1일 정오 직전 발생한 최초의 지진은 약 14초 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지진 직후 발생한 불은 일본의 지진 전문가들의 예측과는 다르게 전개됐다.
많은 시민이 점심 준비를 위해 전통 요리용 난로와 숯을 쓰는 시치린(작은 숯불 구이)과 히바치(숯 화로)에 불을 붙이고 있던 시간에 지진이 나면서 오후 12시 2분쯤부터 시내 곳곳에서 화재가 보고되기 시작했다. 지진 직후 지반이 흔들리면서 건물 상당수가 쓰러졌고 그 뒤 첫 한 시간 동안 도시 전역에서 98건 화재가 관측됐다. 불은 그 뒤 46시간 동안 빠르게 번져나가면서 도쿄 지역의 43%, 건물 21만9084채를 불태웠다.
불이 확산하면서 도쿄 도심에서만 확산하면서 무려 1만4390명이 불에 타 숨졌다. 특히 여러 곳에서 시작한 불이 합쳐지면서 국지적인 강풍을 일으키는 이상 현상인 불의 소용돌이, 사이클론 현상이 발생하며 이동 경로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1일 오후 4시에는 100m 높이의 ‘불 소용돌이’가 타오르며 지나가는 현상이 목격되기도 했다. 최악의 화재는 많은 사람이 대피하고 있던 지역에서 발생해 4만명이 숨지기도 했다.
지진과 대형화재가 동반한 경우는 자주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지진과 동시에 발생한 화재가 소방 능력을 압도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생각이다.
◇ 지진으로 상수도 망가지며 소방시설 역할 못해
실제로 도쿄 도심 곳곳의 상수도관이 파괴되면서 소방 용수 부족도 불이 대형화재로 번지게 된 원인으로 파악됐다. 당시 도쿄 시내에는 7000곳에 소방시설이 설치됐지만 주석으로 된 수도가 녹아내리면서 소방관들이 소방수 부족에 시달린 것으로 보고됐다. 도쿄 일대 성의 해자와 다른 저수지에서 물 공급을 얻으려고 시도했지만 수위가 너무 낮아 소용이 없었다.
찰스 스코손 UC버클리 태평양지진공학연구센터 연구원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불을 껐겠지만 수백 곳의 수도가 파괴된 상황에서 소방관들은 거의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연구진은 이번 분석에서 간토대지진, 간토 대화재와 별개로 수천 명이 질서가 붕괴하면서 폭력에 의해 숨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문화적 도덕적 규범이 무너지면서 재일조선인과 소수자들이 학살에 희생됐다는 이진희 이스턴일리노이대 교수와 재일교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소니아 양 미국 라이스대 교수 등의 이 분야 연구자들의 논문을 인용했다.
이는 일본 정부가 간토대지진 이후 자경단과 일제 군경에 의해 자행된 간토대학살의 희생자를 300~800명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가 폭력에 의해 발생했음을 인정한 셈이다. 민간단체들은 간토 대학살로 최소 6000명 이상 숨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초등학생 눈으로 본 참혹한 광경의 기록...연구 데이터로 사용
생존자들이 남긴 그림은 이번 분석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니시노 토모아키 교토대 방재연구소 연구원은 이번 분석에서 바람에 날리는 불기둥을 포함해 당시 생존자들이 남긴 화재 그림과 증언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화재의 확산, 풍향과 풍속과의 관계를 모델로 만들었다. 니시노 연구원은 “지진 직후 발생하는 화재는 진동 특성과 함께 날씨, 건축 환경과 같은 다른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며 “도쿄와 요코하마에 방화 설비가 잘 갖춰진 건물이 많거나 건물 밀도가 낮았다면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연구진은 “일본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간토대지진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지진학자, 비상 대응팀, 도시 계획가에게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찰스 쉔킹 홍콩대 교수는 “간토대지진은 정치 엘리트들이 재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도를 재건하며 사회적 , 이념적 차원에서 재난을 어떻게 이용하려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도쿄 국제기독교대학의 역사학자인 재닛 볼랜드 교수는 “당시 어린이들이 직접 쓰고 그린 사건에 대한 2000개 이상의 이야기를 수집했다”며 “도쿄 전역에서 화재를 경험한 어린이와 강에서 부모가 익사하는 것을 본 어린이, 도시 외곽에 있다가 피난민들이 대피하는 모습을 본 어린이들이 남긴 재앙적 사건에 대한 개별 경험에서 귀중한 통찰을 얻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1905년 발표된 선견지명이 왜 무시됐는지 재해와 그 여파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화재와 지진 위험 감소에 대한 인식이 재해 후 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1923년 이후 지진과 지진 후 화재 대비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조치를 시행해 왔다.
간토 대화재는 이후 일본 학생들에게 지진 방재에 대한 첫 번째 교훈으로 이어졌다. 최근 일본은 그 교훈의 하나로 일본 전역의 건물 가스계량기에 내진 차단 밸브를 설치하고 있다. 교토대는 교토에 있는 하나오레 단층을 따라 규모 7.5 지진이 발생하면 도심 내 화재가 어떻게 확산하는지 연구하고 있다.
연구진은 일본 외에도 다른 지역에서도 지진 발생 후 화재 위험은 여전히 심각하지만 지진 위험에 따른 화재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포함한 미국 서부 해안, 뉴질랜드 일부 지역은 여전히 지진 활동이 활발하고 목조 건물이 밀집해 있다”며 “지진 완화 계획의 하나로 화재 예방과 대응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2023) https://doi.org/10.1785/0120230106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2023) https://doi.org/10.1785/0120230200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2023) https://doi.org/10.1785/012023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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