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놔두면 진짜 성피해자 욕먹여"…14년차 여검사가 짚은 무고의 이면

정경훈 기자, 조준영 기자 2023. 9. 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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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욱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1부 검사(42·사법연수원 39기). /사진=머니투데이


"무고죄를 엄하게 다스리면 성범죄 피해자가 위축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고를 방치하면 오히려 진짜 억울한 일을 당한 성범죄 피해자들을 욕먹이는 행위가 됩니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1부. 키높이만큼 수북이 쌓인 서류뭉치를 사이에 두고 만난 정정욱 검사(42·사법연수원 39기)는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허위사실로 다른 사람을 성범죄자나 폭행범으로 고소하는 무고 사건을 가려내지 못하면 장기적으로는 실제 성범죄 피해자들까지 의심을 받는 억울한 사례가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정 검사가 10년 넘게 성범죄·강력사건 수천 수만건을 다루며 내린 결론이다.

정 검사는 2010년 인천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해 줄곧 강력부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를 오가며 근무했다. 지난해에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13세 미만 아동을 성 착취한 사건과 3년 동안 100억원 상당의 수익을 취득한 기업형 성매매 사건을 수사해 범죄자들을 구속 기소했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2022년 하반기 모범검사, 3분기 형사부 우수검사로 선정됐다. 2013년과 2016년에도 범죄피해자 보호지원과 관련해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초임 때부터 살인·강도·성범죄 수사를 파고들었던 정 검사가 무고 사건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특유의 꼼꼼함 덕이었다. 정 검사는 "성범죄가 1000건이면 무고 사건은 1~2건쯤 된다"며 " 성범죄 건수에 비해 성범죄 무고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기록을 꼼꼼히 보면 고소 경위가 석연치 않다든가 의심스러운 사례를 자연스레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달에 1명 이상의 무고 사건을 발굴해 처분하는 것은 검찰 내에서도 보통 성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로 평가받는다. 무고 수사를 시작하려면 최초 고소 사건을 검토해 피고소인이 무혐의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사건 하나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수사를 두번 수사를 해야 하는 셈이다. 정 검사는 최근 10개월여 사이에도 12명의 무고 사범을 재판에 넘겼다. 모두 합의금 같은 경제적 이익을 노리거나 보복심을 풀기 위해 허위 고소한 경우다.

소개팅으로 알게 된 변호사를 강제추행죄로 허위 고소했다가 무고 혐의로 지난 7월 불구속 기소된 여성의 사건 전말이 이렇게 밝혀졌다. 이 여성은 변호사라면 직업 특성상 성범죄로 고소당했을 경우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걱정해 합의금을 쉽게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조사됐다. 올 2월 아이돌그룹 출신의 BJ(인터넷 방송인)로부터 강간미수 무고를 당했던 한 기획사 대표 역시 정 검사의 재수사로 이달 초 혐의를 벗었다.

정 검사는 "무고는 어쩌다 보면 할 수 있는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말로 공권력을 동원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경제적, 감정적 만족감을 얻으려는 악질 범죄"라고 말했다.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허위로 고소를 당하면 막심한 심리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BJ로부터 무고를 당했던 기획사 대표도 지난 반년 동안 다른 BJ들이 줄퇴사하면서 회사 운영 등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무고로 있지도 않은 사건에 국가의 수사·재판 기능이 투입되면 다른 범죄에 대응할 여력이 줄어드는 만큼 예상치 못한 범죄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정 검사는 "무고는 공무집행방해 측면에서도 엄하게 처벌해야 하는 범죄"라며 "날조된 진술과 증거를 밝혀내느라 수사력과 사법역량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낭비되고 있겠냐"고 말했다.

검찰의 무고 수사는 지난해 한때 검수완박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으로 검찰의 직접 수사범위에서 제외될 뻔했다가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 복귀) 시행령으로 다시 가능해졌다. 경찰이 사건을 송치하면 검찰이 검토하는 절차상 사실 무고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검찰은 다만 무고가 의심되는 경우에도 은연 중에 성범죄 피해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CCTV(폐쇄회로TV) 영상이나 채팅, 대화 내용 등 명확한 증거가 있을 때 수사를 시작한다. 검수원복 이후 올 상반기 검찰이 인지해 수사한 무고 사건은 139건으로 지난해 상반기(52건)보다 170% 가까이 늘었다.

정 검사는 "무고를 당한 사람들도 몇 년 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형사 대응에 나서는 추세"라며 "무고는 범죄자와 피해자가 한순간에 뒤바뀌는 사건이라 피해자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더 뿌듯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경훈 기자 straight@mt.co.kr 조준영 기자 ch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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