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계약과 다른 노출 촬영 따지니…“위약금 물어라” 압박
구두계약과 실제 계약 말 달라…항의땐 적반하장
피해자들 “노출 사진 공개될까봐 두려움 가져“
성인 화보 업계에서 모델의 동의 없이 노출 사진을 판매하고, 모델에게 강간·성추행 등의 성폭력 가한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난 가운데, 이같은 피해가 ‘벗방’(벗는 방송) BJ와 일본 AV(Adult Video·성인용 비디오) 업계에서 여성을 벌어진 성착취와 닮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델 ㄱ씨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리히로부터 노출 사진이 동의 없이 판매된 피해를 입은 뒤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민 다른 업체로부터 또다른 성폭력을 당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ㄱ씨는 리히를 성폭력처벌법상 불법촬영물 판매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뒤, 지난해 아트그라비아로부터 “우리랑 계약을 하면, 리히가 판매해 유포된 노출 사진을 지우도록 디지털장의사를 고용해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ㄱ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트그라비아와 지난 3월 계약했지만, 장 아무개 대표로부터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장 대표는 지난 7월 다른 모델들에게도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폭로돼, 강간, 강제추행, 불법촬영 혐의 등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모델에 대한 성폭력은 리히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성인 화보 모델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성인 화보 제작사들이 계약시 모델을 ‘기만’하는 행위는 일상적이었다. 리히는 ‘구두 계약’과 실제 계약서를 다르게 쓰는 방식으로 모델들을 속였다. 리히와 계약했던 모델 ㄱ, ㄴ, ㄷ씨의 말을 들어보면, 리히는 공통적으로 모델들에게 ‘쇼핑몰 모델’이라거나 ‘일상복·수영복 정도(의 의상)’, ‘전체이용가 수준’이라는 말로 모델들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또 “원하지 않는 사진은 후보정으로 (노출된 신체 부위를) 가려주거나 사진을 삭제해준다”고 말했다.
또 수위에 대해서도 리히는 ㄱ씨에게 “유두 모양이 옷 위로 드러나는 수준, 살짝 비치는 수준”이라고 하거나, ㄴ씨에게는 “유두, 성기 모양이 절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합의된 수준 이상의 노출 사진이 판매됐고, 이에 대해 모델들이 항의하면 리히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냐”며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리히와 모델들의 계약서를 보면, 공통적으로 ‘갑’(제작사)은 사진 촬영물에 대한 판매·편집·유통 등의 모든 포괄적 권한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 이런 계약서는 제작사 쪽의 권리만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강조한 ‘불공정 계약서’란 지적이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시하는 모델 표준계약서는 촬영물 확인 권한 등 모델의 권리가 명시돼있으며, 특히 ‘노출을 포함한 모델 업무의 경우, 작가는 작업 결과물이 대외적으로 공개 또는 유출되지 않도록 별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적혀있다.
성인 화보 업체 모델을 속여 도장 찍게 한 ‘불공정 계약서’와 노출 사진은 모델을 옭아매는 ‘권력’이 됐다. 모델 ㄷ씨는 “관계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언제 어떤 각도로 찍혔을지 모르는 사진들이, 마음대로 합성돼서 어디에 뿌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계약서를 근거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강요도 있었다. ㄱ씨도 “노출 수위에 대해 따지면 ‘촬영비랑, 인건비, 위약금을 다 물어내라’고 다그치는 강압적인 상황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이러한 성인 화보 제작사의 성폭력은 앞서 불거진 ‘벗방’ 여성 BJ나 일본 AV 여성배우가 성착취와 닮은꼴이다. 일본 성폭력 피해 지원단체인 ‘PAPS’(포르노 피해와 성폭력을 생각하는 모임)가 밝힌 사례들을 보면, AV 출연 피해자들은 대부분 AV가 아닌 다른 촬영 아르바이트라고 일거리를 소개 받아 계약을 진행한 상태에서 사전에 고지되지 않거나 고지된 것 이상의 성적 행위를 강요받았다. 또 계약에 따른 위약금 협박으로 계약유지를 강요당했고 이후 피해 영상이 유통되면서 더 본격적인 촬영을 강요당했다. 국내선 ‘벗방’ BJ ‘소통 방송’이라는 말에 속아 사실상의 노예계약을 맺고 강제로 촬영하게 됐다는 사실이 폭로된 적도 있다.
성인 화보 모델들은 AV배우나, 벗방BJ처럼 성적 이미지를 연기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ㄷ씨는 “‘섹시 컨셉’으로 화보를 찍는 모델들이 당하는 성폭력은, 사회 분위기상 범죄로 인지되기 어렵다. 모델 본인 조차도 피해자라는 인식을 하기 어려워 죄책감에 고통스러웠다”며 “성인 화보 업계는 모델의 이런 자책감을 이용해 모델의 의사를 무시한 행위를 몰래, 또는 대놓고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벗방피해자공동지원단 소속 노혜진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활동가는 “‘벗방BJ’ 산업과 같이 성인 화보 산업 또한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성적 대상으로 활용해 수익을 벌어들인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다”며 “모델들을 ‘제멋대로 성적으로 침범해도 되는 여성’으로 간주하는 편견과 남성중심적 사고가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성인 화보 업계의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모델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일본의 경우 AV배우 성착취 문제가 불거지자, 지난해 6월 ‘AV출연피해방지·구제법’을 제정했다. AV 출연자의 나이·성별에 관계없이 영상이 공개된 뒤 1년 동안은 무조건 계약 해지가 가능하도록 규정하며, 제작업체에게는 출연자의 계약 해지 요구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권이 주어지지 않고, 영상회수와 삭제 등 원상회복 조치 의무가 부여된다.
이하영 성매매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공동대표는 “특정 가해자 한 명의 문제가 아니라, 성인 화보 업계에서 성폭력,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과 부당한 착취가 계속 반복된다”며 “모델에게 성폭력을 가한 경우 강력하게 처벌해야하고, 모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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