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쇼핑몰 모델’이라더니…동의 없이 노출사진 판매했다

채윤태 2023. 9. 1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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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화보업체 ‘리히’ 전 모델 3명 인터뷰
“동의없는 사진판매” 모델 5명, 리히 고소
경찰, 불법촬영물 판매 혐의로 리히 입건
법조계 “동의없이 판매·유포는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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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패션 모델 ㄱ씨는 두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가슴과 성기가 그대로 노출된 사진이 성인 화보 판매 사이트에 올라가 있던 것이다. ㄱ씨는 2020년 여성 의류 쇼핑몰의 ‘속옷 모델’로 계약했는데, 그 때 찍은 사진이 자신도 모르는 새 ‘섹시 화보’로 판매되고 있었다.

5년 넘게 패션 모델로 일하던 ㄱ씨는 2019년 말 여성 의류·화보 업체 ‘리히’의 이아무개 대표로부터 “여성 의류 쇼핑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속옷 모델로 모시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 ㄱ씨는 이 대표가 온라인에서 꽤 유명한 여성 인플루언서라 믿고 계약했다. 하지만 촬영 현장은 기대와 달랐다. 노출이 심한 속옷이 대부분이었다. 리히 쪽은 “노출된 부분은 (후보정으로) 다 가려주겠다”, “원하면 (촬영 원본도) 삭제해주겠다”는 말로 ㄱ씨를 설득했다.

노출 부분 지워주겠다더니…섹시 화보로 판매

그 말을 믿은 게 화근이었다. 리히 쪽에서 ㄱ씨에게 촬영된 사진을 확인시켜 준 건 촬영 첫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ㄱ씨는 리히와 모두 10번 가량 촬영을 진행했으나, 그 뒤로는 단 한번도 카메라 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담겼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촬영본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리히 쪽에선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쩐 일인지 ㄱ씨가 모델이 돼 촬영한 속옷 사진은 2년 동안 쇼핑몰 사이트에 올라오지도 않았다. 리히 쪽은 “요즘 쇼핑몰이 잘 안 돼 업로드를 미루고 있다”고만 했다.

지난해 11월에서야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리히가 운영하는 별도의 성인 화보 사이트 ‘리히익스프레스’와 구독형 화보 판매 플랫폼 등에서 ㄱ씨의 사진이 ‘섹시 콘셉트’ 성인화보로 ‘판매’되고 있다는 말을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이다. ‘성기와 항문, 음모의 직접 노출은 절대 불가’하다고 계약서를 체결했지만, 구독형 화보 판매 플랫폼에 판매되고 있는 사진엔 ㄱ씨의 가슴과 성기 일부가 버젓이 드러나 있었다. ㄱ씨는 “계약과 다르지 않느냐”며, 리히 쪽에 화보로 팔리고 있는 사진을 모두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리히 쪽은 “투자사 반대 때문에 어렵다”는 이유를 대더니, 나중엔 ‘계약서’대로 했는데 무슨 문제냐며 배짱을 부리고 나왔다. 리히 쪽은 ‘노출된 가슴(유두·유륜) 부위를 가림처리 하지 않음’ ‘촬영 사진을 화보로 판매할 수 있다’란 조항을 들이밀었다. ㄱ씨에게 리히 쪽에선 “가슴 전체를 노출하는 게 아니고, 옷 위로 살짝 비치거나 윤곽이 드러나는 정도만 노출된다”며 “원래 다른 모델들도 계약서에는 다 이렇게 써놓는다”고 했었다.

화보 판매와 관련해서도 “남성들이 악의적으로 사진을 퍼가서 불법적으로 판매·유포하는 일이 많은데, 화보로 판매하면 저작권을 보호할 수 있다. 보조적인 차원”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속옷 쇼핑몰 모델인데, 설마 유두나 성기가 드러난 사진을 쓰겠나” 싶어, 믿고 서명한 것을 리히가 무기로 삼은 것이다. ㄱ씨는 “(회사가) 처음부터 아예 이걸 노린 게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모델 ㄱ씨에게 ‘쇼핑몰 화보 모델’을 제안한 성인 화보 제작사 ‘리히’의 인스타그램 메시지. 모델 ㄱ씨 제공
모델 ㄷ씨에게 ‘일상복·수영복’ 화보 촬영을 제안한 성인 화보 제작사 ‘리히’의 인스타그램 메시지. ㄷ씨 제공

계약 해지해도 계속 판매…합성 사진 피해까지

알고보니 ㄱ씨말고도 비슷한 피해를 입은 여성이 여럿 있었다. ㄴ씨는 2021년 8월 리히로부터 ‘섹시 컨셉 화보’ 촬영 제안을 받았다. 화보 촬영은 처음이었지만, 리히의 화보 판매 사이트인 ‘리히 익스프레스’를 보니, 노출 수위가 심하지 않은 사진도 있어 협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ㄴ씨는 계약을 하며 “가슴의 유륜이 노출되지 않고, 유두나 성기 모양이 옷 위로 드러나지 않게 해달라”는 걸 구체적인 조건으로 내걸었다. 리히 쪽에서도 “그렇게 찍지 않겠다”고 했다. “설령 사진에 찍히더라도 가림 처리하거나 (촬영본을) 삭제하겠다”고도 약속했다.

그런데 계약 1년 동안, 가슴과 성기 모양이 그대로 드러난 화보가 계속 판매됐다. ㄴ씨가 처음 “사진을 지워달라”는 요구했을 때만 해도 “다음엔 촬영장에서 (그때그때) 말하라”며 사진을 일부 수정해주곤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더니 “다른 직원한테 말해라” “안된다”란 식으로 반응이 바뀌었다.

ㄴ씨가 동의하지 않은 노출 화보 10개가량이 그렇게 온라인에서 판매됐다. ㄴ씨의 요청에도 화보 삭제는 이뤄지지 않았고, 판매된 사진 일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거쳐, ‘음습한’ 사이트들로 빠르게 번져나가 손 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리히를 믿고 찍은 사진인데 어떡하냐”고 호소했지만, “우리는 (ㄴ씨의) 소속사가 아니라 지켜줄 수 없다”는 식의 답변이 돌아왔다. ㄴ씨는 계약기간 종료 두 달을 앞둔 지난해 6월 계약해지를 요구했다. 리히 쪽에선 화보 사이트에서 그의 화보를 내리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ㄴ씨의 사진은 여전히 별도의 구독형 화보 판매 플랫폼에서 ‘무단 판매’되고 있다.

ㄷ씨의 경우는 찍지도 않은 사진이 합성 유포된 피해를 겪었다. 리히와 ‘일상복과 수영복 정도’의 의상으로 화보를 찍기로 계약한 ㄷ씨는 2020년 7월 리히의 홍보용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자신의 사진을 보고 경악했다. 유두 모양이 옷 위로 드러나는 사진이었다. ㄷ씨는 촬영 당시 옷 안에 속옷을 입고 있어, 원본 사진에는 유두가 노출될 수가 없었다. 리히 쪽에서 사진을 합성해 올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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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와 ㄴ씨 등 리히의 전·현직 모델 4명은 최근 리히의 이 대표 등을 성폭력처벌법 위반(불법촬영물 판매 등)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현재 서울 강남경찰서 등 3개 경찰서가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ㄷ씨의 경우, 리히와 리히의 인스타그램을 관리하는 하청 홍보업체를 성폭력처벌상 허위영상물편집·반포 혐의로 고소했고, 지난달 8일 인천지방법원이 하청 홍보업체 대표에게 유죄를 인정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다만 경찰이 “리히가 합성을 지시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리히에 대해서는 불송치했다. ㄷ씨는 합성 사진에 대해서도 리히에게 책임이 있으며, 리히가 동의 없이 노출 사진을 판매했다고 주장하며 민사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계약서에 적은 것과 상관 없이 모델의 의사에 반해 노출 사진을 판매하는 것은 성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 피해 모델들을 대리하는 배진성 변호사(법무법인 ‘명재’)는 “모델들이 ‘사진을 내려달라’거나 ‘노출을 가리지 않으면 사진 판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리히 쪽은 사진을 계속 판매했다며 “계약서 내용과 상관 없이, 사진을 찍을 당시 (노출에) 동의했더라도, 판매·유포에 동의하지 않으면 성폭력특례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반포등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겨레는 리히 쪽의 입장을 듣기 위해 전화와 이메일 등으로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리히 쪽에선 답변에 응하지 않았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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