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
어두운 밤, 비가 내리고 물이 차오르는 강 속에 가슴까지 물에 잠긴 사람들이 서 있다. 공주보 수문을 개방하자 4대강 사업으로 죽어가던 금강이 다시 흐르면서 조금씩 살아나고 있던 곳. 공주시는 그런 곳을 다시 수문을 닫고 물을 가두려 한다. 지역 축제인 백제문화제에서 유등과 배를 띄울 만큼의 수위가 필요해서다. 강물 속의 사람들은 고작 며칠간의 여흥을 위해 강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고 항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강을 그대로 두고 문화제를 진행하자는 합의는 일방적으로 파기되었고, 경찰과 공무원들은 농성장 천막을 부쉈다. 사람들이 떠나지 않자 공주시는 그대로 계속 물을 채웠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며 수문을 열라는 이들에게 “우린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행정집행은 폭력의 특허장이 되었고 ‘사람이 있는데, 설마’라는 상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과거의 통치자들은 권력 기반이 약화될까 우려해서라도 나라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무서워하는 척이라도 했다. 지금 권력은 ‘여기 사람이 있다’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런 권력의 마음을 관리자들은 귀신같이 읽는다. 국가폭력이 자행되는 도처에서 폭력의 행위자들이 책임 회피와 정당화의 논리로 사용하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란 저 말은 반공 테러와 파시즘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다. 기후위기, 금융위기, 전쟁과 핵 위기가 중첩되어 다중재난의 형태로 닥쳐오는 시기다.
민주주의가 허약한 곳에서는 위기와 재난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질수록 억압의 빈도와 강도도 함께 높아진다. 탄압하면 더 큰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을 때도 권력은 대화와 타협보다 무시와 강압을 선택한다. 이것은 비단 윤석열 정권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 30여년간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국가의 통치 양식이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권력의 대응 수단은 방임과 폭압, 두 가지뿐이다. 외양상 문재인 정부는 좀 더 방임적이었고, 윤석열 정부는 좀 더 폭압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본은 국가의 방치와 통제를 동시에 요구한다. 기업의 환경파괴는 내버려두고 이를 막는 시민은 징벌하라. 기업의 노동착취는 내버려두고 노동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엄벌로 다스려라.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망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존엄한 최후를 준비하자는 말은 우아하게 들렸지만 기후위기란 ‘1.5도’를 넘는 순간 펑 터지고 끝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지구의 최후도, 인류의 종말도 그렇게 일순간으로 막을 내릴 리 없다. 재난에 재난이 물밀듯이 밀려오며 사회는 붕괴되어 갈 것이다. 나는 저 말이 ‘시키는 대로’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인 양 표현하는 이상한 말. 과학적 데이터를 보여주며 인류는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는 임계점을 넘었고,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며 절망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하지만, 실천을 무력화하는 근거로 삼을 필요는 없다. 과학자들이 절망하라고 경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절망적 상황이란 우리가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할 이유다.
시민의 직접 행동보다 기업·정부와의 거버넌스에 의존하려는 이들도 있다. 1990년대 이후 지난 30여년간 탄소배출량이 지금까지 인류가 배출한 탄소배출량의 절반이 넘는데 그 30년은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가 민주주의를 대체했던 시기다. 국제적 기후변화협약 체제 아래에서 더욱 가속화된 탄소배출은 이 거버넌스의 성격과 한계, 실패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약속도, 약속의 파기도, 정치적 세력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협상이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권력이 없으면 협상도 없다. 사회를 바꾸려면 그만큼의 정치화된 힘이 필요하다. 집회와 시위는 그 힘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 권력을 형성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여기 생명이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소리의 목소리’가 되어 계속 그 존재를 드러내고 보여줄 수밖에 없다.
오는 23일 ‘기후정의행진’이 열린다. ‘아직 괜찮다’도 ‘이미 늦었다’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지금 당장’을 외치는 사람들, ‘대안은 없다’를 거부하며 ‘우리가 대안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을 보고, 느끼고, 함께 길을 만들고 싶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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