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 이데올로기의 낙인찍기

기자 2023. 9. 1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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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오펜하이머가 낙인찍혔다
마치 홍범도 장군처럼 말이다
홍 장군 통해 우리 정부는 말한다
누구라도 반대 목소리 높이면
그 낙인을 찍겠다고 말이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돌아왔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입니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이 나라를 제대로 끌고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이념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그러면서 타도의 대상으로 내세운 이념이 ‘공산전체주의’다.

21세기도 중반을 향해가는 이 무렵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의외로 그 해답은 ‘이념’이라는 말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모든 사유에는 세 가지 고유한 전체주의적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이데올로기 사유에 빠진 이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자신이 내세우는 이념 하나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이런 경향을 ‘총체적 설명’이라 부르는데, 이에 빠져든 이들은 이념으로 과거에 대한 완전한 설명, 현재에 대한 완벽한 지식, 미래에 대한 믿을 만한 예측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이 집착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 ‘역사’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자신이 내세운 이념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현재와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정작 이들은 우리 곁에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제대로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들의 싸움은 주로 이미 죽은 것에서 시작한다.

둘째, 이데올로기적 사유에 빠진 이들은 경험의 세계를 무시한다. 같은 사건에서도 각자가 다른 경험을 공유하는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이런 일이 가능해지려면 이데올로기가 경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경험이 이데올로기에 들어맞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현실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주장에 따라 바꾸기 시작”한다. “적의 개념이 음모 개념을 대신”할 뿐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고 마주하는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적 태도가 자리 잡는다.

셋째, 이데올로기에 빠진 이들은 “현실 영역에서는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의 일관성”에 집착한다. 그래서 이들은 경험에서 오는 귀납적 사고 대신 늘 결과가 이미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연역적 논리 고리 안에 갇히고 만다. 이런 고리 안에 갇히게 되면 타인의 다른 경험, 다른 세계의 경험을 볼 수 없게 된다. 자신이 빠져든 이데올로기가 논리적으로 지향하는 하나의 세계만 존재하고, 그 세계는 다른 이들의 경험을 철저히 무시해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렌트의 설명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공세만 해도 그렇다. 이데올로기에 빠진 자들은 언제나 역사와 싸운다. 역사의 물길이 자신이 내세운 세계와 다르다면 자신이 내민 이데올로기의 세계관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 어디에도 없을 일관성에 집착하는 이들에겐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내칠 이유가 된다. 자신들이 떠받드는 박정희 대통령이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헌장을 서훈했다는 사실도 의미는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들에게 문제는 현실이 이데올로기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지,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은 윤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 볼 수 있듯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된다. 심지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는다. 아렌트의 설명처럼 적의 개념으로 음모의 개념을 대신하는 이들에게 이런 과정은 “자동적”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이들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받든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저지르는 모순에서 해방될 자격이 있다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정당성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현실 영역에서는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의 일관성”이 강요되는 대상은 늘 그들이 적으로 삼는 존재다.

하지만 이런 일관성이 비폭력적으로, 평화롭게 달성될 수 있을까? 매카시즘의 경험은 미국 같은 자유 사회에서도 그렇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승전에 원자폭탄 개발로 결정적 공헌을 한 오펜하이머마저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마치 홍범도 장군처럼 말이다. 홍 장군을 통해 우리 정부는 넌지시, 아니 대놓고 말한다. 누구라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면 그 낙인을 찍겠다고 말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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