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책갈피에는 책갈피를 꽂아두지 마라

엄민용 기자 2023. 9. 1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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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흔히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고 한다. 글자만 놓고 보면 “등불과 친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책을 읽기 좋은 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당나라의 학자 한유가 공부를 하러 떠나는 아들에게 지어 준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이란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시에서 한유는 아들에게 “가을이 돼 여름내 내리던 비가 그쳐 날이 개고, 서늘한 바람이 마을과 들판에 가득하여, 이제 등불을 가까이할 수 있으니, 책을 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라고 권한다.

책을 읽는 데 특별히 좋은 계절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한유의 말마따나 볕 좋고 바람 좋은 이때에 잠시 바쁜 마음을 내려놓고 책장을 넘기며 조금의 여유를 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책을 가까이하기 좋은 이 계절이면 책과 관련해 ‘불편한’ 말 하나가 떠오른다. ‘책갈피’다. 우리말 ‘갈피’는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또는 그 틈”을 뜻한다. 따라서 ‘책갈피는 “책장과 책장의 사이”를 가리킨다. 모든 국어사전에 그런 뜻풀이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책갈피가 “읽던 곳이나 필요한 곳을 찾기 쉽도록 책의 낱장 사이에 끼워 두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예전의 국어사전에는 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러한 의미로 많이 쓰는 까닭에 국립국어원이 그 쓰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한 단어가 전혀 다른 두 의미로 쓰이면서 “책갈피에 책갈피를 넣어 뒀다”는 이상한 표현이 가능하게 됐다.

게다가 <표준국어대사전>은 ‘책갈피’의 뜻풀이에서 ‘서표’와 ‘갈피표’ 같은 동의어를 알려 주지 않고 있다. 이 부분이 더 아쉽다. “읽던 곳이나 필요한 곳을 찾기 쉽도록 책갈피에 끼워 두는 종이쪽지나 끈”을 가리키는 말로 예부터 써 오던 것이 ‘서표(書標)’다. 같은 의미의 말로 ‘갈피표’도 있다. 따라서 “책갈피에 책갈피를 넣어 뒀다”는 “책갈피에 서표(갈피표)를 넣어 뒀다”로 쓰는 것이 좋다. 아울러 “책 따위에 표지를 하도록 박아 넣은 줄”을 가리키는 말은 ‘보람줄’이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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