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24시] 276회 vs 3.72회
경력 30년을 넘긴 한 법조인은 '형사소송법 교과서, 그 자체'라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땐 그만큼 방대하고 치열한 법리 공방이 계속되는 줄 알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재판정에 들어갔다. 이백몇 번째 공판이었다. 기대했던 공방 대신 듣는 이 하나 없는 지루한 낭독회가 이어졌다. 재판부와 검찰은 물론 피고인조차 재판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법조인을 다시 만나 따졌다. 당신 의견에 동의할 수 없노라고. 그는 헛웃음을 삼키며 부연했다. "고시 공부할 때 빼고는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는, 형소법과 대법원 예규 등에 나오는 원칙과 절차를 모두 있는 그대로 구현하고 있는 재판"이라고. 그제야 형소법 교과서라는 표현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난 15일 1심 결심공판을 가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 얘기다. 기소 이후 결심까지 재판일수 1677일. 기자들 사이에서는 '네버엔딩스토리'로 불렸다. 번갈아가며 재판 내용을 챙기는 재판 풀(Pool)에서 빠지는 언론사도 부지기수였다. 인사이동으로 재판부를 떠난 법관의 목소리가 '원칙'이라는 이유로 반년 넘게 법정에서 재생되기도 했다.
법조인들에게 초장기 재판의 이유를 묻자 누군가는 검찰의 '트럭 기소'가 문제라고 했다. 다른 누군가는 피고인 측이 증인신문조서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아 211명의 증인이 재판정에 다시 나왔다고 비판했다. 정치가 문제라는 말까지 나왔다. 확실한 것은 사법부가 매번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던 법관 부족 문제는 아니었다.
현직 법관들에게도 재판이 길어진 이유를 물었다. 각자 나름대로 법리적인 이유를 열거했다. 문득 "그건 난 모르겠고~"라던 과거 개그 프로그램 유행어가 생각났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공감결핍증에 대한 패러디. 과연 누군가 한 명씩 붙잡고 설명한들 이토록 길어진 재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법부 한 해 통계를 망라한 '사법연감' 최신편(2022년)에는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과 같은 1심 형사공판 합의 사건의 평균 공판 횟수가 나와 있다. 3.72회, 국민 대부분은 3~4번의 공판만으로 죄의 값이 정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의 1심 공판 횟수는 276회, 평균값의 74배였다.
[전형민 사회부 bromi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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