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하면서도 무서운 혀

한겨레 2023. 9. 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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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의 유리창 너머][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아니쉬 카푸어, ‘혀’, 2017, 실리콘과 페인트, 244×183×110㎝. ©Anish Kapoor, DACS/SACK 2023. 국제갤러리 제공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깜깜한 동굴 안에 뼈도 없이 길쭉한 괴물이 산다. 괴물은 자유자재로 몸을 휘었다가 늘리고 납작하게 폈다가 둥글게 말기도 한다. 눈도 귀도 없고 콧구멍조차 뚫리지 않은 이 괴물은 오로지 피부의 감촉으로 느끼고 반응한다. 동굴 안은 천장이 낮아 괴물이 옴짝달싹하기 어렵지만, 입구가 열리면 그것의 시뻘건 몸체가 드러난다. 하지만 몸통의 반이 동굴 바닥에 붙어있는 괴물에게 외출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루에 몇 번 동굴 안으로 외부의 물질이 들어올 뿐이다.

이 괴물은 바로, 우리 입 안에 사는 혀다. 내가 혀를 괴물이라 여기게 된 계기는 서울 종로구의 국제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아니쉬 카푸어(1954~)의 작품 ‘혀’를 본 순간이다. 뾰족하고 커다란 혓바닥이 캔버스 밖으로 불쑥 돌출된 이 작품은 괴기스러워 보인다. 동굴을 벗겨내어 환한 조명 아래 진짜 모습을 까발린 내장 기관으로서의 혀다. 입술이라는 어여쁜 입구 속에 이렇게 징그러운 괴물이 들어 있다니, 새삼 놀랍다. 괴물은 영어로 monster인데, ‘보여준다’는 뜻의 라틴어, monstrare가 어원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기에 단순한 구경에서 그치지 않고, 시각적 충격을 동반하는 괴물이 된 걸까? 평소에 보기 좋게 포장되어 있던 것, 별것 아닌 듯 감추어져 있던 것, 혹은 이목을 끌지 않던 흉한 것이 갑작스럽게 눈앞에서 보란 듯이 본색을 드러낸다면, 당연히 충격으로 놀랄 수밖에.

‘혀’는 색채의 호소력도 섬뜩하리만치 대단하다. 검붉은색은 향긋한 꽃의 색이라기보다는 비릿한 피의 색이다. 생명체가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뿜어내는 색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험과 공포의 분위기를 풍기며 선혈이 낭자한 죽음의 세계로 우리의 상상력을 발동시키기도 한다. 생명을 지속하고자 하는 열망 배후에는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게 마련이다.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카푸어는 하늘과 구름을 비추어 보여주는 거울처럼 반짝이는 스테인리스스틸 야외조각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전혀 반짝이지 않는 무광의 특수안료를 써서, 관람자에게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득한 경험을 하게 해준 미술가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들으면, 관람자는 그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재료를 가지고 각기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진행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한 겹 더 파고들면 상이한 두 방향의 작업이 한 점으로 모인다.

카푸어가 즐겨 쓴 재료는 스테인리스스틸과 특수안료이다. 거울처럼 광을 낸 스테인리스스틸은 빛을 완벽히 반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대조적으로 그가 특별히 고집하는 흑색, 검푸른색, 검붉은색 등의 무광 안료는 빛을 100% 가까이 흡수한다. 요컨대 카푸어는 빛이 있음과 빛이 없음을 다루고자 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빛이 있는 곳 또는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門)의 역할을 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빛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우리 내부가 빛으로 가득하지는 않다. 빛은 문화화되고 교육받은 것들이다. 반면 어둠은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단테의 문학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이르는, 분노와 절망, 쾌락 욕망과 악마적인 것으로 불리는 저 깊숙한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친밀하고도 무서운 내적 어둠 안에 머물고 있다.”

카푸어는 ‘혀’를 통해 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나드는 혀의 본성을 나타내려 한 듯하다. 신체 안에 숨어있던 침묵의 혀가 아니라, 신체 바깥으로 나와 뭔가를 보여주려는 혀의 괴물다움을 그는 강조한다. 혀는 깜깜하고 축축한 동굴 속에 살면서, 본능과 감정을 일깨우는 감각적인 경험을 축적한다. 하지만 그 혀로 인간은 언어를 배우고 의견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문명화된 세상에 진입하게 된다. 언어를 통해 목소리를 실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 빛의 영역이라면, 언어와 목소리를 얻지 못해 억압되는 본능들은 어둠의 영역에 있다.

빛의 지배를 받는 우리는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을 잊고 지내며, 그것의 잠재적 영향력을 믿지 않는다. 아예 어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도 있다. 무시당하고 억눌려있던 내부의 어둠은 어느 순간 에너지를 얻어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그것이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능력을 과시하면 놀랄 만큼 끔찍한 괴물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 혀는 친밀하지만 나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이 무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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