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기류?…도로공사, 불법 파견 소송에서 승소 [김진성의 판례 읽기]

2023. 9. 17.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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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역 업체 노동자들 직고용 청구, 1심서 기각
IT 업종까지 번진 분쟁 제동 걸리나

[법알못 판례 읽기]

경북 김천에 위치한 한국도로공사 본사. 사진=한국도로공사 제공



한국도로공사가 교통 관리 시스템 등 고속도로 정보통신 시설을 관리하는 용역 업체 소속 노동자들과의 불법 파견 소송에서 승소했다.

법원은 도로공사가 과업지시서를 두고 용역 업체들에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 정보를 제공했다고 해서 이 업체들의 직원들을 상대로 지휘·명령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최근 노동자들이 연이은 승소에 힘입어 불법 파견 분쟁 전선을 넓혀 가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다소 안도할 만한 판례가 나왔다는 평가다.

 

 “과업지시서만으론 지휘·명령 인정 안 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41부(정회일 부장판사)는 2023년 8월 10일 대보정보통신·스마트비전·아이트로닉스·진우산전 등 도로공사의 용역 업체 네 곳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낸 근로에 관한 소송(사건번호 : 2021가합52802)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용역 업체에 소속돼 교통 관리 시스템, 터널 교통 관리 시스템, 요금 징수 설비, 제한 차량 단속 설비 등 정보통신 시설을 유지·관리하는 업무를 해 왔다. 도로공사는 자회사인 고속도로정보통신공단을 민영화한 2002년부터 정보통신 시설 관리를 외부 업체에 위탁해 왔다. 2010년부터는 2~3년마다 공개 입찰을 통해 지역별·사업별 사업자를 선정하고 있다.

원고들은 이 같은 정보통신 시설 관리 방식이 사실상 파견 근로를 바탕으로 이뤄졌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도로공사의 지휘·명령을 받아 업무를 해 왔다”면서 “파견법에 따라 도로공사에 직접 고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견법은 2년 이상 파견 노동자로 근무한 직원은 사업주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도로공사가 정보통신 시설 △정기 점검 △수리 △장애 복구 △품질 관리 등을 과업 대상으로 정한 과업지시서를 용역 업체들에 제공했다는 사실을 핵심 근거로 제시했다. 이에 도로공사 측은 “과업지시서는 용역 업체들이 업무를 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이라며 “각 용역 업체는 과업지시서 내용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계획을 세워 업무를 하고 직원들을 관리했다”고 반박했다.

법원에선 도로공사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재판부는 “용역 업체들은 독자적으로 점검 계획을 짰고 관리할 시설별로 점검 항목과 절차에 관한 업무 매뉴얼도 상세하게 만들었다”면서 “과업 대상을 기재한 과업지시서만으로 (도로공사가) 용역 업체 노동자들을 상대로 지휘·명령권을 행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용역 업체 관리자들이 정기 회의를 통해 업무 현황과 계획서 작성, 인력 관리 및 배치, 교육 계획 등을 논의해 현장 팀원들에게 꾸준히 공지해 온 사실과 출근부를 비치해 직원 출퇴근 현황을 직접 감독한 사실도 판단 근거로 삼았다.

도로공사에는 점검이나 수리 등 원고들의 업무를 함께할 수 있는 부서나 인력이 없기 때문에 파견 관계를 인정할 만한 하나의 작업 집단 역시 구성돼 있지 않은 것으로 봤다.

 

 불법 파견 인정 소송 판세 역전되나

이번 판결로 그동안 불법 파견 분쟁에서 열세를 보였던 기업들이 다소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법원에선 하청 노동자의 불법 파견 주장을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대법원은 2022년 7월 포스코에 “광양제철소 협력 업체 직원 59명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한 데 이어 올해 4월 하청 업체 노동자가 원청 정직원으로 일했으면 더 받을 수 있었던 임금을 산정하는 기간을 10년까지 잡을 수 있다는 판례도 내놓았다. 지난 7월 현대자동차의 2차 협력 업체 직원들을 파견 상태로 인정한 1심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이 같은 판결 흐름을 확인한 하청 노동자들은 점점 적극적으로 원청을 상대로 파견 노동자의 지위를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걸고 있다.

한동안 제조업과 서비스업에서 주로 벌어지던 불법 파견 소송전이 정보기술(IT) 등 다른 업종으로도 번지는 양상이다. 현대차는 현재 생산 관리 프로그램(MES) 전산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는 협력 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파견 상태인지를 두고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

한 노동담당 변호사는 “제조업 2차 협력 업체뿐만 아니라 IT 업종 노동자까지 불법 파견 소송전에 뛰어드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주목할 만한 판례가 나왔다”며 “불법 파견 분쟁의 전선이 확대되는 흐름에 조금은 제동이 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돋보기]
 

 ‘구체적 지시’ 증명해야 불법 파견 인정

드물기는 하지만 도로공사 외에도 원청 기업이 불법 파견 소송에서 이긴 사례는 몇 개 더 있다. 이 사례에서도 도로공사와 마찬가지로 하청 노동자들이 업무를 직접 지시한 구체적 정황을 입증하지 못하면서 원청 기업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41부(정회일 부장판사)는 2023년 7월 A 씨 등 현대차 울산공장 직원들의 출퇴근용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사 10명이 원청을 상대로 제기한 근로에 관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들은 현대차와 구내 버스 위탁 계약을 한 B사 소속으로 일해 왔다. 운전 외에도 차량 정비와 주유 지원 등의 업무도 맡았다. 이들은 본인들이 파견 노동자라고 주장하면서 2020년 현대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현대차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현대차가 운전사들을 상대로 ‘업무 수행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봤다.

재판부는 “현대차는 B사와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것일 뿐 구속력 있는 지시를 했다고 보긴 어렵다”며 “원고들의 업무는 자동차 제조 및 판매와 명백히 구별되며 현대차 총무팀 소속 노동자들과도 서로 업무를 보완하거나 협업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지난 1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광주근로자건강센터 사무국장으로 일하다 퇴직한 A 씨와 파견 지위 여부를 두고 다툰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은 2심에서 패소한 판결에 불복해 A 씨가 제기한 상고를 심리 불속행으로 기각했다.

근로자건강센터는 50명 미만이 일하는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의 직업성 질환 예방과 상담 등을 하는 기관으로 전국 23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는 2012년 4월 문을 연 뒤 2019년까지 조선대 산학협력단이 위탁 운영해 오다가 2020년 근로복지공단 순천병원으로 위탁 운영 기관이 바뀌었다.

새 위탁 운영 기관이 고용을 승계하지 않으면서 A 씨는 그해 퇴직했다. A 씨는 그 후 “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부터 업무 수행에 관한 지휘·명령을 받는다”며 원청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1심에서 패소했지만 2심에서 판결을 뒤집었다. 광주를 비롯해 지역별 센터가 노동자 인사 관리를 자체적으로 해 왔다는 점이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에 대한 운영 실태 평가가 공단의 성과 관리 지표에 맞춰 이뤄지고 공단이 통합 전산 시스템을 통해 센터의 주간·월간 실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등 1심에서 A 씨가 승소했던 주요 근거는 지휘·명령의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개별적인 업무 수행 방식과 관련한 점검 항목이 없기 때문에 (공단이) 이를 활용해 A 씨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업무를 지시했거나 구체적인 업무 과정과 방법을 감독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에서도 이 같은 판단이 그대로 유지됐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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