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39] 가터벨트는 음흉한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스타킹을 찬 허벅지 위 검은 벨트의 모습이 성적 흥미를 돋우기 때문입니다.
‘섹시한 여자의 비결’, ‘특별한 날의 필수품’, ‘자극적이고 화끈하게’. 초록 검색창에 가터벨트라는 단어를 쳤을 때 마주친 문장입니다. 가터벨트가 지닌 성적 위상을 짐작하게 하지요. 특정 물건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페티시즘’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여기 가터벨트를 영광의 상징으로 삼으며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훈장처럼 망토에 이미지를 새겨놓고 다닐 정도지요.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이를 명예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변태 집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굳건한 군주제를 자랑하는 영국 왕실의 충직한 신하들 모임인 ‘가터 기사단’이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어쩌다 여성 속옷인 가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일까요.
외설스러운 명예...가터훈장은 무엇인가
가터 기사단은 영국 군주로부터 가터훈장을 받은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을 왕이 직접 임명하지요. 영국 왕과 왕세자인 웨일즈 왕자를 비롯해 총 26명이 기사단으로 간택됩니다. 가터 훈장과 기사단은 7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훈장과 기사라는 의미이지요. 영국 왕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훈장으로도 명성이 자자합니다.
무도회장에서 탄생한 가터 훈장?
‘가터 훈장’ 명칭 기원에 대한 여러 설이 존재합니다. 기사단의 기원을 명시한 문서가 소실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솔즈베리 백작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에드워드 3세 시절인 14세기 중반이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의 망치’라고 불렸습니다. 스코틀랜드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잉글랜드의 영토를 늘린 전사왕이어서입니다.
그가 통치시절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였던 칼레에서 무도회가 열렸습니다. 솔즈베리 백작 부인인 조앤이 춤을 추고 있었지요. 그때 조앤의 속옷과 스타킹을 교정하고 있던 가터가 스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 올려 크게 비웃습니다.
홀에 모인 왕족과 귀족의 시선이 쏠립니다. 어떤 이들은 히죽히죽 조롱의 웃음을 보냈고, 또 어떤 사람은 경멸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부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이때 그녀 옆에 한 사내가 나타납니다. 왕 에드워드 3세였습니다. 자기 다리에 그것을 묶었지요. 비웃던 하객들을 향해 소리칩니다. “악을 생각하는 자에게 수치가 있으리”(Honi soit Qui mal y pense·중세앵글로노르만 방언).
이 때부터 였습니다. 가터가 속옷의 의미를 넘어 잉글랜드 왕실의 상징이 되었던 것은요. 가터 기사단의 망토에는 떡하니 가터 엠블럼이 자리합니다. 에드워드 3세의 사자후를 ‘모토’로 삼았습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벌과 여주인공의 스토리 같은 이야기지요.
사자왕 리처드 1세에서 영감받았을 수도
그 후의 이야기가 흥미를 돋웁니다. 무도회장 가터의 주인공인 솔즈베리 백작 부인은 얼마 후 남편 토마스 홀랜드와 사별합니다. 그리고 곧 재혼하게 되지요.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상대였습니다. 가터 사건 당시 자신을 구원해준 에드워드 3세의 며느리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녀의 가문은 잉글랜드 왕실의 가문과 결혼할 수준은 되지 않았음에도 에드워드 3세는 조앤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아들 에드워드도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가 홀몸이 되기만을 기다렸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무도회장에서의 어여쁜 모습을 보아서였을까요.
학자들은 가터 기원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가터 기사단이 창설된 시기인 1348년. 그리고 166년이 지난 1512년이 되어서야 ‘무도회장 탄생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인문주의 학자인 폴리도르 버질이 쓴 ‘앵글리카 히스토리아’라는 책에서였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에드워드 3세보다 2세기 앞선 선대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전쟁에서 그의 기사들 허벅지에 가터를 매줬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리처드 1세의 무훈을 되새기며 이런 가터기사단을 창립했다는 해석입니다.
가터 기사단 탄생 배경에는 100년 전쟁이 있었다
설은 여럿이지만, 에드워드 3세가 1348년 가터 기사단을 창설했다는 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는 왜 자신의 기사단을 만들었을까요.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 유럽 사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가 재위하던 14세기 중반은 프랑스와의 100년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3세는 1328년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사망하자, 자신이 프랑스 왕위 계승 서열에 우위가 있음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샤를 4세의 가장 가까운 친인척은 에드워드 3세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프랑스의 공주인 이사벨라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프랑스 귀족사회는 모계 혈통으로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먼 친척이지만 부계 혈통이자 샤를 4세의 사촌 발루아 백작 필리프를 왕위로 옹립하지요. 발루아 왕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혈통이 프랑스 왕위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새로 즉위한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의 영지인 가스코뉴를 몰수하자 둘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이렇게 외치지요. “짐의 정당한 영지와 더불어 프랑스의 왕좌를 다시 찾겠다.” 100년 전쟁의 시작입니다.
전쟁은 칼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정치를 통해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게 승리의 핵심 요소이지요. 특히나 영주들의 자율권이 있던 중세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에드워드 3세로서는 ‘가터 기사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봉건 영주들 역시 에드워드 3세와 필립 6세 사이에서 줄서기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했던 것이었지요. 가터가 속옷과 스타킹을 연결하듯,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역사도 연결하고 있던 셈입니다.
“난 필요 없다”...훈장을 거절한 사람
가터훈장은 제정된 이후, 공적이 혁혁한 이에게 수여되곤 했습니다.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도 받을 수 있었지요. 평민은 가터 훈장을 받은 뒤 귀족 기사로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 역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3관왕에 올려 놓은 뒤 기사 작위를 받았지요. 그의 이름에 Sir가 붙는 배경입니다.물론 그는 가터 기사단은 아니지만요.)
영국이 낳은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던 윈스턴 처칠과 가터의 인연도 깊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 영국 왕실로부터 가터 훈장 서임을 제안받았습니다. 단번에 거절했지요. 그가 이끈 보수당이 선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훈장을 거절한 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선거패배라는 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또 다른 훈장은 과분하다.” 처칠은 품위가 있는 달변가였습니다. 1951년 그가 다시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총리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기꺼이 가터 훈장을 받아 들였습니다.
군주들 친목용 가터 훈장...조선의 악몽을 불렀다
가터 훈장은 때로는 군주들의 네트워크용으로도 활용됐습니다. 제국주의 시절부터 다른 나라 군주들과 우정을 다지는 용도로도 사용되면서였습니다. 네덜란드·룩셈부르크·스페인 등 7개국 군주들이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됐습니다.(물론 이들은 26명의 정원 외 인물입니다.)
가터 훈장은 우리 영욕의 역사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영국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인하는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지요.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중앙아시아·흑해를 두고 벌인 경쟁(그레이트 게임)에서 영국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영국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었지요.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얻었기에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러시아의 야욕을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가 동아시아를 기반으로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 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연스레 러시아의 야욕을 막을 ‘친구’를 찾아야 했었지요. 제국주의적 야욕을 키우고 있던 나라 ‘일본’이었습니다.
1902년 영일동맹의 시작이었지요. 1905년 당시 일왕 무쓰히토가 가터 훈장을 받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입니다. 이듬해에는 후임 요시히토가 가터 기사단에 이름을 올리지요. 성 조지 예배당에는 일본 왕가의 공식 문장이 휘날립니다. 조선으로서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 시작되는 셈이었습니다.
줬다 빼앗은 훈장...갈라진 영일관계
국제 정치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지요. 그들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일본과 영국은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우선 영국은 러시아제국이 망하고 소련으로 전환되면서 일본제국의 필요성이 줄었습니다.
또 새롭게 떠오르는 미국은 ‘영일동맹’을 무척이나 싫어했지요. 태평양을 두고 경쟁하는 미국과 일본이 전투를 벌일 경우, 영국은 ‘영일동맹’ 조약에 따라 미국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이 지속적으로 태평양에서 세를 불리고 있었기에, 미국은 영국에게 ‘동맹 파기’를 압박하기 시작했지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1921년 ~ 1922년)에서 파기가 최종 결정됩니다. 학계에서는 일본이 동맹 파기 이후 영국을 향한 불신으로 추축국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가터 기사단의 ‘줄줄이 제명’을 불렀습니다. 영국과 전쟁을 벌인 국가의 군주들은 여지없이 훈장을 박탈당합니다. 태평양 전쟁으로 연합국과 적대 전선을 강화한 일본의 히로히토의 이름이 가터 기사단에서 제외됐지요. 1941년이었습니다. 앞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제명되기도 했었지요.
일 왕가가 다시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된 건 전쟁 이후 50년이 훌쩍 지난 후부터였습니다. 2차 대전의 생채기가 아물 무렵이었던 1971년 히로히토가 다시 영국을 공식 방문해 양 왕가가 관계를 이어나간 것이지요.
일본의 헛발질 다시 없기를
1998년에는 전 일왕 아키히토가 가터 기사단에 가입합니다. 아키히토는 현재 기사단 멤버 중 유일한 비기독교인이자 유이(唯二)한 유색인종이기도 합니다. (2022년에 노동당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흑인 여성 발레리 아모스가 가터 기사단에 임명됐지요.)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기사 작위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기사단에서 제외되는 건 국교의 단절과 훈장 대상자의 죽음 뿐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아키히토는 전범이 잠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는 최소한의 양심은 보여 주었습니다.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냈었지요. 그는 이전 일왕들보다는 가터훈장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부디 일본의 왕실이 오랜 기간 가터기사단의 일원이기를 바랍니다.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가터 훈장을 박탈당하는 역사의 비극이 재발되지 않기를 원해서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웃나라가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부디 일본의 정치인들이 가터 훈장의 본 뜻을 깊게 되새기기를. ‘악을 생각하는 자에게 수치가 있으리’.
<네줄 요약>
ㅇ여성 속옷의 일종인 ‘가터’는 영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훈장으로 통한다.
ㅇ700년 전 에드워드 3세가 가터 훈장과 기사단을 창설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친위대를 구성한 것이었다.
ㅇ제국주의 시절에 영국 왕실은 친목도모용으로 다른 국가 군주에게 가터 훈장을 주기도 했다.
ㅇ영국은 가터 훈장을 일왕에게 수여한 후, 그들의 조선 침략을 묵인했다. 우리에겐 ‘가터’가 끔찍한 역사로 기록된 셈이다.
<참고 문헌>
ㅇ피터 J. 베젠트, 가장 고귀한 가터 훈장의 650년, 스핑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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