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 이후 엄마의 밤, 불면의 나의 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제 그림은 <밤들>(르완다어로 아마조로·AMAJORO)이에요. 이 그림을 그릴 무렵이 영화 제작이랑 이런저런 일로 잠을 잘 못 자던 때였어요. 뭘 읽을 수도 없고, 일할 수도 없는 지루한 밤이요. 문득 어린아이였을 때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엄마가 굉장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앉아 있었어요. 이제는 제가 자라서 엄마가 지나온 그 밤에, 차 한 잔을 놓고 앉아 있는 거예요.”
2023년 9월9일 르완다 현대미술전이 열린 서울 용산구 갤러리 데시에고. 전시를 위해 방한한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미리암 우 비라라가 자기 작품 가운데 <밤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목욕하는 여자, 거울 보는 여자, 선풍기 앞에 앉은 여자 등 주로 여성을 작품 소재로 삼아 아프리카 여성의 관계·감정·일상을 그렸다. 미리암은 “이 작은 그림은 잘린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인물에겐 인생이 있고 그 인생은 계속된다”고 설명했다.
대학살 뒤 고도성장, ‘납치 신부’ 등 상흔 여전
2023년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된 미리암의 첫 장편영화 <신부>(The Bride)의 시놉시스를 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여성을 그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부>의 배경은 르완다 집단학살 사건 3년 뒤다. 의과대학 진학을 꿈꾸던 젊은 여성 ‘에바’는 납치 방식의 전통결혼을 강요받았고, 보수적인 가족 앞에서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에바는 결혼 뒤 남편 가족이 집단학살 기간에 겪어야 했던 비극적 이야기를 알게 되고, 결혼에서 도망칠지 남을지 고민한다.
르완다 집단학살은 약 100일 동안 80만 명 이상의 르완다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독일·벨기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진 식민지배 과정에서 백인처럼 키가 큰 투치족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통치했고, 다수파 피지배계급 후투족과 소수파 지배계급 투치족 사이엔 강력한 원한이 자리잡았다. 1994년 후투족 출신인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여객기 추락으로 사망하자 소수파 투치족이 배후로 지목됐는데, 이때 후투족 손에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 80만 명이 살해됐다. 한 가족 안에 투치족과 후투족이 섞여 있기도 했기에, 종족 관념 때문에 가족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르완다는 최근 싱가포르를 롤모델로 강력한 치안과 경제성장에 집중하면서 인권의 진전을 이뤘지만 ‘납치 신부’ ‘대학살’ 등의 상흔은 여전히 남아 있다. 1990년대 르완다에서 유년기를 보낸 미리암 역시 낯선 사람에게 납치돼 결혼한 주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자신의 숙모 몇도 납치돼 결혼했고, 이들은 삼촌과 아이를 낳고 살면서 평범한 사회공동체의 일원이 됐다. 사람들은 ‘가족의 탄생엔 마치 원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갔고, 이런 여성들은 때로 집단학살 뒤 ‘멸족 위기에 처한 가족을 소생해야 하는 역할’(감독의 말 중에서)을 맡아야 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미리암을 포함한 작가 총 8명의 그림 50여 점이 전시됐다. 아프리카 르완다는 우리에게 ‘커피’나 ‘학살’로 알려진 먼 나라지만,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작가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와 닮았다.
인물 위에 잔상을 겹쳐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한 티모시 완둘루는 “층층이 작품을 그릴 때, 마지막에 작품을 어떻게 완성할지 머릿속에 그린 상태로 작업하지 않는다”며 “인생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평생 올 줄 몰랐던 서울에 이렇게 와 있듯 지금 하는 일이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너무 깊이 생각하기보다 층을 하나씩 넣으면서 나중에 좋은 일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하려 한다”고 말했다.
햇살을 닮은 노란색을 주로 작품에 활용한 제미마 카키지는 “사람들이 작품을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긍정적인 색을 쓰고 싶었다”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사는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안부를 물으면 모두 ‘괜찮다’고 답하지만, 실은 괜찮지 않은 순간이 많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작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이 괜찮은지 신경 쓰지 않는 사회에서, 옆 사람이 정말 괜찮은지 물을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다”고 말했다.
한국의 아프리카 지원 프로젝트에 일부 작품 기부
르완다 현대미술전 ‘아프리칸 오로라’(African Aurora)는 9월30일까지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부티크 ‘갤러리 데시에고’에서 열린다. 작가들은 이번 전시 공간을 제공한 이광희 디자이너가 아프리카 남수단에 망고나무를 심고 학교를 짓는 등 지원활동을 해온 것을 알고 자신의 작품 일부를 기부하기로 했다. 르완다에서 정신질환 아동을 돕는 작가 브레이브 탄츠는 이날 자기 작품을 이광희 디자이너의 ‘희망의 망고나무’ 프로젝트(아프리카 빈곤지역 주민 자립지원)에 써달라며 기부했다. 아프로퓨처리즘(아프리카 전통문화, 서구 과학기술, 판타지 등이 접목된 예술사조)에 기반한 작품 등을 선보이는 작가 MDD도 고국에 돌아가 기부할 작품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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