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두 아내와 동침” 묘사에 발칵…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한 ‘이 작가’ [나쁜 책]
[금서기행, 나쁜 책-10] 카잔차키스 ‘최후의 유혹’
※아래 기사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교인이 읽기에 불편한 신성모독적 표현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불쾌감을 느끼실 수 있음을 미리 고지하오니 원치 않는 경우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시기 바랍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 ‘최후의 유혹’은 치명적인 작품입니다. 종교계 성직자들은 책 출간도 전에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고, 최고 지도부가 카잔차키스를 종교계에서 파문하게 만들었던 책이지요.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 뒤 이단 논쟁은 더 커졌습니다. 흥분한 시민들은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상영 중이던 극장에 방화 테러를 실행했고, 13명이 희생되는 끔찍한 사고도 발생했습니다.
논쟁의 중심에 선 카잔차키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세계적 작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계 성직자들로부터 죽고 나서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소설에서, 예수가 받았던 ‘최후의 유혹’이 과연 무엇이기에 작가는 그토록 미움을 샀던 걸까요.
가난한 목수 예수는 신(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영성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보잘 것 없는 내가 결코 신이 보내신 메시아일 리가 없다”며 계시를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내면의 목소리 때문에 번뇌합니다.
예수는 광야로 떠나고, 결국 신과 대면합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말씀’을 전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받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성경 말씀과 별로 다를 게 없지요.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 위에 올라간 순간’부터 책은 작가의 위험한 상상으로 도배됩니다.
천사는 예수에게 “신께서 당신(예수)을 불쌍히 여겨 십자가 처형을 면해주셨고, 이제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허락하셨다”고 기쁜 표정으로 말합니다.
예수와 천사는 울부짖는 유대인 사이로 빠져나옵니다. 그때부터 예수에겐 선물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선물’은 연인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이었습니다.
◎ “천사여. 예수가 당황해서 말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미소를 지으며 천사가 대답했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이에요. 누가 결혼을 하는데요? 당신(예수)요.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첫 기쁨이죠. 예수는 피가 머리로 솟구쳤다.” (689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3세 때부터 알고 지냈던 첫사랑이었습니다. 예수는 레몬꽃을 머리에 단 막달라 마리아와 벅차는 전율 속에서 가정을 이룹니다. 신은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을 예수에게 선물했습니다. 이 선물은 사실 첫 번째 유혹이었지만요.
천사는 슬퍼하는 예수를 라자로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과거 예수는 죽은 지 4일이 지난 라자로를 소생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라자로의 두 여동생 마리아(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성)와 마르타는 예수를 극진히 모십니다.
상심한 예수에게, 천사는 예수의 재혼을 제안합니다. 신께서 데려가신 막달라 마리아를 잊고 평범한 삶을 재개하라는 유혹이었지요.
신의 아들에서 인간으로 돌아간 예수는 마리아와 마르타 둘과 각각 동침하며 평생 수십 명의 아들딸을 낳습니다. 아이들이 마당을 가득 채울 정도였습니다. 두 배우자와의 사랑, 그리고 자녀 양육이 ‘남편이자 아버지 예수’에게 허락됐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만났던 저 천사의 정체는 바로 사탄(악마)이었습니다. 예수는 그것도 모르고, 신이 보낸 천사(사탄)의 제안을 전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받았던 최후의 유혹은 바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는 바울과 대면합니다. 예수는 사기꾼 바울을 비난하지만 바울은 당당합니다. 바울은 고통받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해선 예수의 거짓 죽음과 거짓 부활이 필요하다고 항변합니다. 책에서 둘은 수 페이지에 걸쳐 격렬하게 논쟁합니다.
◎ (예수의 비판) “내가 나사렛 예수인데, 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적도 없고, 부활한 적도 없어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사기꾼! 그런 거짓말로 감히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섰단 말이에요?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735쪽)
◎ (사도 바울의 항변) “세상의 부패와 불의와 가난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예수는 정직한 인간, 핍박받던 사람들에게 소중한 위안이 되었어요. 알 게 뭔가요. 세상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만이죠. 십자가에 매달렸느냐 안 매달렸느냐 따위에는 난 관심도 없습니다. ” (737쪽 발췌)
예수는 바울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두 아내의 죽은 오빠인 ‘라자로’로 이름까지 바꾸고 자신을 신으로 받드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어 은둔자로 살아갑니다.
제자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옛 스승’ 예수에게 욕설을 퍼붓습니다. 예수의 의무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었는데도 죽음 직전에 도망쳤다는 점에 관한 날카롭고 매서운 비판이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곁에 평생을 머문 천사가 사탄 악마임을 정말 몰랐던 것이냐면서 예수를 추궁하기도 합니다. 예수는 눈물을 흘리며 사죄합니다. 제자들은 끝내 예수를 외면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가 눈을 뜹니다.
정신을 차리니 예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을 발견합니다. 방금까지 경험했던, 수십 년에 걸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몽땅 가짜 환영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탄을 보내 유혹의 결말을 거짓 환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 그것이 바로 예수가 받은 최후의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는 그제서야 자신의 의무이자 약속이 십자가 위의 죽음임을 완벽하게 깨닫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소설 속 예수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요. 꼭 책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신성 모독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소설에서 예수의 평범한 삶을 ‘거짓 환영’으로 결론 냈지만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두 아내를 거느린 예수라는 불경스러운 묘사는 용납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작가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의 이단성 논란 때문에 사망 후에도 그리스 정교회의 박대를 받았습니다. 당시 대주교는 카잔차키스의 시신이 그리스 본토에 안장되는 걸 거절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크레타섬의 신부들만이 그의 매장을 허용했습니다. 아래 사진이 그의 크레타섬 묘소입니다. 마른 통나무 두 개를 맞댄 나무 십자가가 처연해 보입니다.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최후의 유혹’ 이단 논쟁은, 영화 상영과 동시에 전 세계적 이단 논쟁으로 확산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영화 상영을 금지시킬 테러 계획을 세웁니다.
결국 프랑스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파리의 생 미셸 극장은 1988년 10월 23일 이 영화관 지하 1층에서 폭탄이 터져 화재가 일어납니다. 지금도 운영중인 이 극장(에스파스 생 미셸)의 홈페이지를 보니 방화 테러로 영화관은 잿더미가 됐고 13명이 큰 화상을 입었다고 하네요.
이 영화를 제작한 유니버셜의 모회사인 미국 MCA 앞에서는 수천 명 교인들의 피켓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스콜세이지 감독은 살해 위협까지 받았고 한동안 경호원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 “지상에 화려하게 만발한 함정들을 극복한 승리, 사람들이 누리는 크고 작은 기쁨의 희생, 희생에서 희생을, 승리에서 승리를 거치며 순교의 정상인 십자가로 오르던 길….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고뇌를 다시 살아야 한다.” (9쪽)
카잔차키스는 소설에서 예수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경험했을 진짜 고통은, 예수의 육체에 가해졌던 고통만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인간의 삶’이 아니었겠느냐는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진짜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등과 허리와 허벅지와 종아리에 내리쳐졌던, 유리와 쇠구슬 박힌 채찍의 살갗 터지는 고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삶, 배우자와 함께 사랑하며 아이를 양육하는 바로 그런 삶을 소설적으로 가정해보고 상상해봐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소설 ‘최후의 유혹’은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위에 거짓된 환상을 보여준 뒤 독자가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고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것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요?
카잔차키스는 지극히 문학적인 방식으로 이 물음을 세상에 던졌는데, 세상은 ‘십자가에서 도망쳐 두 아내를 거느린 예수의 상을 묘사했다’며 이 책을 종교 금서로 지정한 것이지요.
로마군인은 매일 십자가에 유대인을 매달아 처형하는데, 유대인이 죽을 십자가를 손으로 깎아 만들고 이를 골고다 언덕에 ‘배달’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입니다. 이를테면 소설 속 예수는 ‘로마군 십자가 납품업자’인 셈입니다.
모든 목수가 유대인을 죽일 십자가 제작을 거절했지만 유독 예수만이 로마군인에게 협조하는 것으로 작가 카잔차키스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예수를 배교자라면서 침 뱉고 저주하지요.
작가 카잔차키스는 왜 소설 속 예수를 십자가 만드는 목수로 그렸던 걸까요. 정말 의미심장한 대목이지요.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독자가 홀로 답을 내려볼 필요가 큰 대목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울러 제자 유다가 유대인 공동체를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반면, 예수가 인류 전체의 종교적 구원을 위한 영적 메시아를 자처하면서 발생하는 둘 사이의 소설 속 갈등도 흥미로운 논쟁거리입니다.
카잔차키스는 니체와 불교에 빠져들었고, 결국 예수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유럽 내 구도자들이 결집하는 성지인 아토스산을 오르며 영혼 구원을 갈구했습니다. 구약 ‘출애굽기’의 무대인 시나이산 근처에 거주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그의 별명은 20세기 문학의 구도자입니다.
‘선배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학적 성취를, 당대 후배 작가들은 모르지 않았습니다. 카잔차키스는 9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1957년 단 1표 차이로 노벨문학상 수상 기회를 놓쳤는데 그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페스트’와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였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수상 이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나보다 노벨상을 받을 이유가 수백 배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동시대 최고의 작가임을 인정받는 일이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동시대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신에게 더 다가가기 위하여 신을 모독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카잔차키스는 유죄일까요, 무죄일까요.
※다음주에는 중국 작가 팡팡의 《우한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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