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두 아내와 동침” 묘사에 발칵…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한 ‘이 작가’ [나쁜 책]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9. 16.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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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기행, 나쁜 책-10] 카잔차키스 ‘최후의 유혹’

[금서기행, 나쁜 책]은 전 세계 현대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국가가 발행을 중단시킨 문학, 좌우 논쟁을 촉발한 논픽션, 외설의 누명을 쓴 예술, 동서고금의 필화 스캔들을 다룹니다.

※아래 기사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교인이 읽기에 불편한 신성모독적 표현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불쾌감을 느끼실 수 있음을 미리 고지하오니 원치 않는 경우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시기 바랍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 ‘최후의 유혹’은 치명적인 작품입니다. 종교계 성직자들은 책 출간도 전에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고, 최고 지도부가 카잔차키스를 종교계에서 파문하게 만들었던 책이지요.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 뒤 이단 논쟁은 더 커졌습니다. 흥분한 시민들은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상영 중이던 극장에 방화 테러를 실행했고, 13명이 희생되는 끔찍한 사고도 발생했습니다.

논쟁의 중심에 선 카잔차키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세계적 작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계 성직자들로부터 죽고 나서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소설에서, 예수가 받았던 ‘최후의 유혹’이 과연 무엇이기에 작가는 그토록 미움을 샀던 걸까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최후의 유혹’을 원작 삼은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한 장면. 가운데가 예수, 오른쪽 여성이 그녀의 ‘연인’ 막달라 마리아, 왼쪽 남성이 유다입니다. [Imdb·유니버셜]
‘최후의 유혹’ 한국어판은 우리나라 1세대 번역가 고(故) 안정효 선생이 번역했습니다.
십자가 위 예수가 경험한 세 가지 ‘최후의 유혹’
‘최후의 유혹’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약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와 착취를 끝내줄 메시아를 갈구했습니다. 로마군은 십자가에 유대인을 매달아 죽였고, 골고다 언덕엔 시체 썩는 냄새와 피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가난한 목수 예수는 신(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영성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보잘 것 없는 내가 결코 신이 보내신 메시아일 리가 없다”며 계시를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내면의 목소리 때문에 번뇌합니다.

예수는 광야로 떠나고, 결국 신과 대면합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말씀’을 전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받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성경 말씀과 별로 다를 게 없지요.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 위에 올라간 순간’부터 책은 작가의 위험한 상상으로 도배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전 모습. 그의 소설 ‘최후의 유혹’은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그가 만 70세에 쓴 말년의 걸작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박물관 홈페이지]
소설 ‘최후의 유혹’을 원작 삼은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한 장면. ‘십자가 위에 올라간 순간’부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불온한 상상력이 시작됩니다. [Imdb·유니버셜]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때문에 기절했던 예수가 눈을 떠보니 한 어린 천사가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죽은 건지, 아직 살아 있는 건지 몰라 혼란스러워 합니다.

천사는 예수에게 “신께서 당신(예수)을 불쌍히 여겨 십자가 처형을 면해주셨고, 이제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허락하셨다”고 기쁜 표정으로 말합니다.

예수와 천사는 울부짖는 유대인 사이로 빠져나옵니다. 그때부터 예수에겐 선물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선물’은 연인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이었습니다.

◎ “천사여. 예수가 당황해서 말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미소를 지으며 천사가 대답했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이에요. 누가 결혼을 하는데요? 당신(예수)요.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첫 기쁨이죠. 예수는 피가 머리로 솟구쳤다.” (689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3세 때부터 알고 지냈던 첫사랑이었습니다. 예수는 레몬꽃을 머리에 단 막달라 마리아와 벅차는 전율 속에서 가정을 이룹니다. 신은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을 예수에게 선물했습니다. 이 선물은 사실 첫 번째 유혹이었지만요.

예수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의 결혼이라는, 신의 아들이자 인류의 메시아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던 ‘평범한 삶’을 허락 받습니다. [Imdb·유니버셜]
예수가 눈을 떠보니 천사가 다가와서는 “신이 십자가형을 면해주셨다”며 예수 몸에 박힌 못을 고통 없이 빼줍니다. [Imdb·유니버셜]
마리아·마르타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맞이하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신혼생활이 며칠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막달라 마리아가 알 수 없는 이유로사망합니다. 예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절규합니다. 그러나 신의 두 번째 선물(유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슬퍼하는 예수를 라자로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과거 예수는 죽은 지 4일이 지난 라자로를 소생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라자로의 두 여동생 마리아(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성)와 마르타는 예수를 극진히 모십니다.

상심한 예수에게, 천사는 예수의 재혼을 제안합니다. 신께서 데려가신 막달라 마리아를 잊고 평범한 삶을 재개하라는 유혹이었지요.

신의 아들에서 인간으로 돌아간 예수는 마리아와 마르타 둘과 각각 동침하며 평생 수십 명의 아들딸을 낳습니다. 아이들이 마당을 가득 채울 정도였습니다. 두 배우자와의 사랑, 그리고 자녀 양육이 ‘남편이자 아버지 예수’에게 허락됐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만났던 저 천사의 정체는 바로 사탄(악마)이었습니다. 예수는 그것도 모르고, 신이 보낸 천사(사탄)의 제안을 전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받았던 최후의 유혹은 바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이었던 것이지요.

소설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는 두 아내와 수많은 아이를 낳는 가장이 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삶을 허락 받습니다. 예수는 이 평범한 삶을 신의 선물로 여겨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Imdb·유니버셜]
예수를 신으로 ‘연출’한 사도 바울과의 논쟁
이때, 예루살렘에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했으나 다시 부활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예수는 죽은 적도 부활한 적도 없었는데, 사도 바울이 거짓 소문을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바울과 대면합니다. 예수는 사기꾼 바울을 비난하지만 바울은 당당합니다. 바울은 고통받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해선 예수의 거짓 죽음과 거짓 부활이 필요하다고 항변합니다. 책에서 둘은 수 페이지에 걸쳐 격렬하게 논쟁합니다.

◎ (예수의 비판) “내가 나사렛 예수인데, 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적도 없고, 부활한 적도 없어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사기꾼! 그런 거짓말로 감히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섰단 말이에요?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735쪽)

◎ (사도 바울의 항변) “세상의 부패와 불의와 가난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예수는 정직한 인간, 핍박받던 사람들에게 소중한 위안이 되었어요. 알 게 뭔가요. 세상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만이죠. 십자가에 매달렸느냐 안 매달렸느냐 따위에는 난 관심도 없습니다. ” (737쪽 발췌)

예수는 바울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두 아내의 죽은 오빠인 ‘라자로’로 이름까지 바꾸고 자신을 신으로 받드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어 은둔자로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예수는 33년을 살았습니다. 소설 ‘최후의 유혹’에선 노인이 된 예수가 그려집니다. 천사(실제로는 사탄)는 평생 예수 곁을 떠나지 않고 예수의 평범한 삶을 독려합니다. [Imdb·유니버셜]
“배신자 예수, 당신은 오래 전에 죽어야 했소”
이제 소설 결말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예수는 백발 노인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노인 예수에게 죽음이 찾아온 겁니다. 옛 제자 12인이 ‘가짜 라자로’인 예수를 방문합니다.

제자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옛 스승’ 예수에게 욕설을 퍼붓습니다. 예수의 의무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었는데도 죽음 직전에 도망쳤다는 점에 관한 날카롭고 매서운 비판이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곁에 평생을 머문 천사가 사탄 악마임을 정말 몰랐던 것이냐면서 예수를 추궁하기도 합니다. 예수는 눈물을 흘리며 사죄합니다. 제자들은 끝내 예수를 외면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가 눈을 뜹니다.

정신을 차리니 예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을 발견합니다. 방금까지 경험했던, 수십 년에 걸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몽땅 가짜 환영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탄을 보내 유혹의 결말을 거짓 환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 그것이 바로 예수가 받은 최후의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는 그제서야 자신의 의무이자 약속이 십자가 위의 죽음임을 완벽하게 깨닫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소설 속 예수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요. 꼭 책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16세기 화가 가우덴초 페르라리의 ‘그리스도의 삶과 열정’. [Wikimedia Commons]
죽을 때까지 용서받지 못한 작가 카잔차키스
1953년 ‘최후의 유혹’이 발표되자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와 신부들은 카잔차키스를 당장 이단으로 몰아세웠습니다. 1954년 로마 교황청은 ‘최후의 유혹’을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1955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그리스 정교회 회의 참석자들은 카잔차키스의 모든 책을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신성 모독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소설에서 예수의 평범한 삶을 ‘거짓 환영’으로 결론 냈지만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두 아내를 거느린 예수라는 불경스러운 묘사는 용납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작가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의 이단성 논란 때문에 사망 후에도 그리스 정교회의 박대를 받았습니다. 당시 대주교는 카잔차키스의 시신이 그리스 본토에 안장되는 걸 거절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크레타섬의 신부들만이 그의 매장을 허용했습니다. 아래 사진이 그의 크레타섬 묘소입니다. 마른 통나무 두 개를 맞댄 나무 십자가가 처연해 보입니다.

그리스 크레타섬에 안장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 나무를 엮어 만든 십자가 하나가 그의 내면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William Neuheisel·Wikimedia Commons]
1957년 카잔차키스가 사망하고 약 31년 뒤 세계적인 영화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최후의 유혹’을 영화로 제작합니다. 1988년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최후의 유혹’ 이단 논쟁은, 영화 상영과 동시에 전 세계적 이단 논쟁으로 확산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영화 상영을 금지시킬 테러 계획을 세웁니다.

결국 프랑스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파리의 생 미셸 극장은 1988년 10월 23일 이 영화관 지하 1층에서 폭탄이 터져 화재가 일어납니다. 지금도 운영중인 이 극장(에스파스 생 미셸)의 홈페이지를 보니 방화 테러로 영화관은 잿더미가 됐고 13명이 큰 화상을 입었다고 하네요.

이 영화를 제작한 유니버셜의 모회사인 미국 MCA 앞에서는 수천 명 교인들의 피켓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스콜세이지 감독은 살해 위협까지 받았고 한동안 경호원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1988년 10월 23일 프랑스 파리의 생 미셸 극장은 방화로 사실상 전소됩니다.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상영에 대한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였습니다. 13명이 희생된 방화사고는 당시 뉴욕타임스가 ‘종교 전쟁’에 비유할 정도로 큰 논란이었습니다. [에스파스 생 미셸]
카잔차키스는 왜 이런 위험한 소설을 쓴 걸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 서문에 이렇게 씁니다.

◎ “지상에 화려하게 만발한 함정들을 극복한 승리, 사람들이 누리는 크고 작은 기쁨의 희생, 희생에서 희생을, 승리에서 승리를 거치며 순교의 정상인 십자가로 오르던 길….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고뇌를 다시 살아야 한다.” (9쪽)

카잔차키스는 소설에서 예수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경험했을 진짜 고통은, 예수의 육체에 가해졌던 고통만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인간의 삶’이 아니었겠느냐는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진짜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등과 허리와 허벅지와 종아리에 내리쳐졌던, 유리와 쇠구슬 박힌 채찍의 살갗 터지는 고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갈망하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삶, 배우자와 함께 사랑하며 아이를 양육하는 바로 그런 삶을 소설적으로 가정해보고 상상해봐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소설 ‘최후의 유혹’은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위에 거짓된 환상을 보여준 뒤 독자가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고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것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요?

카잔차키스는 지극히 문학적인 방식으로 이 물음을 세상에 던졌는데, 세상은 ‘십자가에서 도망쳐 두 아내를 거느린 예수의 상을 묘사했다’며 이 책을 종교 금서로 지정한 것이지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전 직접 교정을 본 본인의 작품들. [니코스 카잔차키스 박물관 홈페이지]
소설 속 ‘목수 예수’가 십자가를 배달한 이유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지점이 있습니다. 소설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의 직업은 목수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톱과 손도끼와 대패와 나사로 제작하는 목제품은 요람이나 침대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입니다.

로마군인은 매일 십자가에 유대인을 매달아 처형하는데, 유대인이 죽을 십자가를 손으로 깎아 만들고 이를 골고다 언덕에 ‘배달’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입니다. 이를테면 소설 속 예수는 ‘로마군 십자가 납품업자’인 셈입니다.

모든 목수가 유대인을 죽일 십자가 제작을 거절했지만 유독 예수만이 로마군인에게 협조하는 것으로 작가 카잔차키스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예수를 배교자라면서 침 뱉고 저주하지요.

작가 카잔차키스는 왜 소설 속 예수를 십자가 만드는 목수로 그렸던 걸까요. 정말 의미심장한 대목이지요.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독자가 홀로 답을 내려볼 필요가 큰 대목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울러 제자 유다가 유대인 공동체를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반면, 예수가 인류 전체의 종교적 구원을 위한 영적 메시아를 자처하면서 발생하는 둘 사이의 소설 속 갈등도 흥미로운 논쟁거리입니다.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십자가를 ‘배달’하는 예수의 모습. 예수는 메시아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전의 직업이 목수였는데, 그가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십자가였습니다. [Imdb·유니버셜]
이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이 무수한 철학적, 종교적 주제를 담아낼 수 있었던 동력은 방랑에 가까운 삶과 번민, 그리고 종교적 갈증 때문이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니체불교에 빠져들었고, 결국 예수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유럽 내 구도자들이 결집하는 성지인 아토스산을 오르며 영혼 구원을 갈구했습니다. 구약 ‘출애굽기’의 무대인 시나이산 근처에 거주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그의 별명은 20세기 문학의 구도자입니다.

‘선배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학적 성취를, 당대 후배 작가들은 모르지 않았습니다. 카잔차키스는 9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1957년 단 1표 차이로 노벨문학상 수상 기회를 놓쳤는데 그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페스트’와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였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수상 이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나보다 노벨상을 받을 이유가 수백 배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동시대 최고의 작가임을 인정받는 일이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동시대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신에게 더 다가가기 위하여 신을 모독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카잔차키스는 유죄일까요, 무죄일까요.

카잔차키스는 학술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니체, 부처, 예수에 심취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의 수도원을 여행하며 영적 구원을 갈구했습니다. 사진은 카잔차키스가 찾기도 했던, 유럽 구도자들이 모이는 아토스산의 한 수도원. [가브리엘·Wikimedia Commons]
크레타섬에 안장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라고 적혔습니다. 소설가이자 구도자로서의 그의 삶을 응축하는 문장입니다. [하르트무트 리엠·Wikimedia Commons]
이 기사는 다음 책과 논문을 참고했습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안정효 옮김, 『최후의 유혹』, 열린책들, 2010년.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순하 옮김, 『영혼의 일기』, 거송미디어, 2006년. ◎ 안숭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나타난 기독교 비평장(場) 연구: 복음서 재현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신앙과 학문》Vol.16 No.2, 기독교학문연구회, 2011.

※다음주에는 중국 작가 팡팡의 《우한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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