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현장을가다] (18)피난민촌에 예술 입혀 국제적 관광명소로
'미술 프로젝트'로 마을 구석구석에 예술품 설치하고 빈집은 문화시설로
계단식 작은 집들에 파스텔톤 색상 입혀 아름다운 경관 완성…연 300만 관광객 유치
주민들 공동작업장 만들어 200여개 일자리 창출…주거환경도 대폭 개선
[※ 편집자 주 = 현대 도시의 이면 곳곳에는 쇠퇴로 인한 도시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산업구조 변화와 신도시 개발, 기존 시설의 노후화가 맞물리면서 쇠퇴는 갈수록 빠르고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쇠퇴한 도시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주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도시 경쟁력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도시재생은 쇠퇴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그치지 않고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도시의 재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도시 재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연합뉴스는 모범적인 도시재생 사례를 찾아 소개함으로써 올바른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부산=연합뉴스) 백도인 기자 = 부산시 사하구 감천2동인 감천문화마을은 처마산과 옥녀봉으로 둘러싸인 산비탈에 있다. 조선 말에는 겨우 40여가구가 있었던 아주 작은 산동네였다. 그러나 부산 보수동에 거주하던 태극도 신도들이 대형 화재로 1955년 집단 이주하고 피란민들까지 몰려들면서 지금과 같은 대규모 마을이 형성됐다.
그러나 경사도가 심한 산비탈에 10평씩도 안 되는 판잣집과 움막들이 즐비했으니 집집이 화장실과 수도와 같은 시설을 갖추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 인근의 아미동 비석마을과 마을 형성 배경 및 생활 환경이 흡사하다.
어려운 처지였지만 주민들은 '모든 길은 통해야 한다. 앞집이 뒷집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길을 내고 집을 지었다. 모든 집이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으로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이 만들어진 것은 이 덕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판잣집과 움막은 시멘트 집으로 바뀌었지만 계단식 구조의 마을 형태는 변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산에서 2번째로 낮은 삶의 질…열악한 환경에 인구 급감
열악한 생활환경 탓에 감천마을 일대는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급격히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1980년 2만5천명이 넘었던 인구는 20년 만인 2010년께 9천400여명으로 급감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전체의 2.4%였던 600여명에서 20.9%인 1천900여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부산시 전체의 노인 인구 비율 12.8%를 크게 웃도는 것이었다.
소득, 건강, 교육 등 주민의 주요 삶의 질은 부산시 전체 205개 동 가운데 두 번째로 낮았다.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검토했으나 산비탈에 올망졸망한 집들이 가득한 구조였으니 사업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는 사이 빈집들이 하나둘 늘어나며 마을은 점점 쇠퇴하고 황폐해졌다.
절망적인 상황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동 미술사업인 '마을 미술 프로젝트' 대상에 선정되면서 반전의 실마리를 찾았다. 예술가에게는 창작활동 기회를 주고 주민에게는 미술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담과 골목, 거리 곳곳에 10점의 조형예술작품이 들어섰다. 이듬해인 2010년에는 6개의 빈집을 사진갤러리 등의 문화 공간으로 리모델링하고 골목에 추가로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2012년에는 이와 비슷한 '마추픽추 골목길 프로젝트'를 통해 다시 3개의 빈집을 활용한 문화시설과 예술작품들이 만들어졌다. 감천문화마을의 명소가 된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나 '골목을 누비는 물고기' 작품은 이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70여개 예술작품 설치…마을 경관과 어우러져 관광 명소화
2016년과 2017년에는 '감천 아랫마을 내려가기 프로젝트'가 잇따라 이뤄졌다. 공공 마을 미술사업에서 소외된 감천문화마을의 아랫동네로 예술품 설치를 확대하는 사업이었다. 이는 마을 경관을 아름답게 하는 도시재생사업의 범위를 넓히고 아랫마을 주민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들 프로젝트를 통해 감천문화마을에 설치된 예술작품은 모두 70여개에 이른다. 예술이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가난한 달동네가 예술 작품이 지천인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후 계속 빈집들을 리모델링해 예술작가의 창작 공간과 작품 갤러리, 예술 체험공간으로 꾸미면서 예술과 문화 마을이라는 이미지는 더욱 뚜렷해졌다.
부산 사하구청의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감천문화마을 도시재생사업'도 본격화했다. 태극도 신도들과 피란민이 만들었다는 마을의 역사성, 산비탈 좁은 골목을 따라 작은 집들이 계단식으로 층층이 들어선 독특한 구조, 부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전망 등을 고려해 '문화적 도시재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다. 문화적 도시재생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 자원을 활용해 환경을 개선하고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개념이다. 다행히 마을 곳곳에 이미 들어선 수많은 예술작품이 큰 호응을 얻고 있던 터였다.
아름다운 마을 만들려 건물 색깔·간판 재질까지 기준 정해
사하구청은 먼저 마을 풍경을 아름답게 꾸미기로 하고 모든 건물을 6가지 색깔 가운데 하나로 칠하도록 했다. 건물 벽면, 외벽, 창틀까지 색을 세분화해 제시했다. 당시 이질적이고 강렬한 색상의 건물이 들어서면서 마을 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던 터였다. 낡은 집들은 지붕 공사를 하고 깨끗하게 도색을 했다. 무질서한 가게의 간판들도 규격, 색채, 재질, 조명까지 세심하게 기준을 정해 제시했다. 이 덕분에 감천문화마을은 파스텔톤의 알록달록한 집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을 유지할 수 있게 됐고 '한국의 산토리니', '부산 마추픽추', '레고 마을' 등의 수식어가 뒤따랐다.
입소문이 나면서 관광객이 몰려왔다. 사업 초기인 2011년 2만5천명에 불과하던 방문객은 2014년 80만명을 넘어섰고 2017년 205만명, 2018년 258만명에 이어 2019년 308만명으로 300만명을 돌파했다. 이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이 전체의 60%가량을 차지할 만큼 많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명소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감천문화마을에서 만난 박송현(21·서울)씨는 "매일 성냥갑 같은 고층 아파트만 보며 사는데,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다"며 "바닷바람도 좋아, 꼭 한번은 와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지수(28·서울)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야기를 듣고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풍경도 모두 아름답고 독특하다. 특히 계단식의 집이 각양각색으로 색칠된 것이 인상적이다"고 말했다.
주민들 10여개 공동 사업장 개설해 수익·일자리 창출
주민들은 관광객 증가에 맞춰 카페와 기념품점, 식당, 게스트하우스 등의 공동체 사업장을 열었다. 주민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주민들로 구성된 '감천문화마을 주민협의회'가 운영하는 공동체 사업장은 11곳, 매출액은 16억원 안팎에 달한다. 여기에서 나온 수익금은 마을 발전기금으로 만들어 주민에게 환원한다. 주민들이 월 1만원이면 마을 목욕탕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덕분이다. 마을 안의 상점도 100개가 넘는다. 이들 공동체 사업장과 점포들을 통해 만들어진 일자리는 200여개에 이른다.
협의회는 이와 함께 주민들로 생활개선사업단을 꾸려 노후 주택의 도배와 장판 교체, 수리를 지원하고 관광객을 상대로 마을해설사도 운영한다. 마을 연극단과 합창단을 꾸리고 해마다 골목길을 주제로 한 축제를 열기도 한다. 비전문가인 주민들이 주도하는 축제인데도 많을 때는 7만명 이상이 다녀갈 정도로 부산의 대표 축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공동 화장실·빨래방 만들고 공원 조성해 주거환경 개선
열악한 생활 및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도 이어졌다. 가장 먼저 냄새나는 공동 화장실들을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하고 하수와 정화조 처리 시설을 갖췄다. 빈집들을 철거한 뒤 경로당과 공동 작업장, 쌈지 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 마을 빨래방과 목욕탕도 만들었다. 주차공간과 도로를 확충해 주민 불편을 덜어주고 무료 셔틀버스 운행도 확대했다. 경사가 심한 계단을 오르내리는 노인의 안전을 위해 난간을 설치하고 가로등과 방범시설도 늘렸다.
김경열 협의회장은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마을이 많이 깨끗해지고, 생활도 편리해지고, 관광객도 많이 찾아온다. 피란민촌이 이렇게 변할 거라곤 아무도 상상을 못 했을 것"이라면서 "이제 마을 관광화로 인한 혜택을 어떻게 주민에게 돌려줄 것인가가 과제"라고 짚었다.
감천문화마을의 성공은 수많은 수상 실적으로도 확인된다. 한국관광 100선 3회 연속 선정, 아시아 도시 경관상 대상, 아름다운 마을 미술상, 대한민국 도시재생 우수 정책 장관상,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 민관협력 우수 사례 공모대회 대통령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부산시 사하구청은 "사람이 떠나가던 쓸쓸했던 달동네가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고, 일자리가 생기고, 삶의 질이 높아지는, 활기 넘치는 마을로 변모했다"며 "주민과 행정 모두의 노력과 열정, 참여, 협업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doin1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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