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분열이 초래한 리비아 대홍수 비극
북아프리카 리비아 동부 지중해 인근 항구 도시 데르나를 지난 10일(현지 시각) 강타한 대홍수 사망자가 1만1000명을 넘어섰다. 여기에 더해 실종자가 1만여 명으로 추정돼 사망자는 2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리비아 적신월사(아랍 지역의 적십자 단체)는 15일 “구조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확인된 인명 피해가 빠르게 늘고 있다”며 “현재까지 1만1300명이 사망했고, 1만100명이 실종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에 대해 국가의 실패가 초래한 예고된 인재(人災)였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열대성 폭풍우 ‘대니얼’이 닥쳤을 때 불어난 물을 막아줬어야 할 상류의 댐 두 곳이 큰비에 허무하게 무너진 탓에 사상자가 급증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아울러 홍수에 대비하는 기상 예보가 작동하지 않았고, 댐이 무너지기 전 이뤄졌어야 할 지방 정부의 긴급 재해 경고조차 없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그 결과 닥치는 재앙을 감지하지도 못한 시민 수만 명이 무너진 댐에서 쏟아져 나온 급류에 휩쓸려 지중해로 떠내려가 생명을 잃었다.
리비아는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매장량 기준)으로 2000년대까지만 해도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무상 의료·교육을 실시할 만큼 국가의 행정력과 재정도 충분했다. 하지만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군벌 간 내전 상태가 10년 이상 이어지면서 기본적 국가 기능이 마비됐다. 페테리 탈라스 세계기상기구(WMO) 사무총장은 14일 “정치적 문제로 리비아는 기상 예보와 재해 경보가 작동하지 못했다”며 “내전·분쟁을 겪는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가 비슷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리비아 동부 지역의 홍수 피해가 집중된 데르나는 장기간 지속된 리비아의 내전 상황과 이에 따른 국가 행정력의 붕괴가 어떻게 국민의 삶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한때 분열된 국가의 재건을 도운 유엔 등 국제사회나 미국 등 서방 강대국의 중재 역량 약화도 리비아의 국가 실패가 방치되게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2011년 ‘아랍의 봄(아랍권 국가들의 민주화 시위)’ 여파로 40년 넘게 집권한 카다피 독재 정권이 무너진 뒤 리비아는 동부를 장악한 리비아 국민군(LNA)과 서부 트리폴리 통합 정부(GNU)가 충돌하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져 왔다. 데르나는 특히 이러한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었다. 데르나는 카다피 시절 지속적으로 독재 반대 운동이 벌어진 이른바 ‘반골 도시’로 2011년 내전 발생 전부터 기반 시설이 낙후한 상태였다. 카다피 사망 후엔 대립하는 두 세력 중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아 낡아가는 사회 기반 시설이 그대로 방치돼 왔고, 재난 경보와 주민 대피를 제대로 실행할 기관이 없었다.
이 같은 무정부 상태를 테러 조직이 파고들었다. 2015년 리비아에서 무장 이슬람 세력 ‘이슬람국가(ISIS)’가 처음 발호한 곳이 데르나다. 그 과정에 분쟁이 이어지며 도시 곳곳이 파괴됐다. CNN은 “2017년 ISIS가 리비아에서 축출된 뒤에도 데르나의 ISIS 잔당은 리비아 동부를 장악한 LNA의 통제에 저항했다. 결국 LNA가 2018년 데르나를 접수하긴 했으나 망가진 도시 재건엔 무관심했다”고 전했다.
최근 기후변화로 이번 폭풍우가 유난히 강하긴 했지만 이전에도 데르나는 호우 피해가 일어나던 지역이었다. 1942년부터 2011년까지 홍수만 다섯 차례 겪었다. ‘사상자가 나오는 대홍수 발생 가능성이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하지만 이런 경고를 받아들여 대책을 세울 행정 조직이 유명무실하다보니 대책 마련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폭풍우로 무너진 강 상류의 두 댐은 각각 1973년, 1977년 건설됐다. 50년이 넘은 낡은 댐은 2002년 이후 한 번도 보수가 이뤄지지 않았다. 2007년 한 터키 업체가 댐 보수 계약을 맺었지만 2011년 내전이 터지면서 공사는 지금까지 중단된 상태다. 리비아 세바대학이 지난해 “댐 붕괴 위험이 크다”며 “(댐 붕괴에 따른) 범람을 피하려면 당장 유지 보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적도 있다. 이 경고 또한 묵살됐다.
예보·경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탈라스 WMO 사무총장은 “국가 단위 경보를 발령할 수 있는 기상 당국이 제 기능을 했다면 홍수로 인한 인명 피해 대부분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리비아의 기상 예보 시스템 개선 작업을 돕기 위해 리비아 당국 접촉을 시도했지만 (내전으로) 불안한 국내 안보 상황 탓에 실현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데르나 현지 시민들도 부적절한 경보 시스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LNA와 GNU 모두 대홍수 경고를 했다고 주장하고는 있다. 그러나 시민들 증언은 다르다. “TV·라디오 등으로 제대로 된 경고나 대피 신호를 받은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심지어 부적절한 통행금지가 발령되는 바람에 피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피해가 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폭풍우가 닥친 10일 밤 LNA 관계자들이 TV에 출연해 “시민들은 섣불리 대피하지 말고 집 안에 머물라”고 지시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데르나의 피해 상황은 너무나 광범위해 복구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지 추산조차 힘들다”며 “(잔해를 걷어내는) 기본 복구에 몇 달 이상, 도시 기능을 회복하는 데는 몇 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편 리비아가 12년 동안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방치된 배경에 국제사회의 무관심과 유엔의 역량 부족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카다피를 축출한 국민이 기대한 민주주의 시스템이 갖춰지기는커녕 무장 세력 간 충돌로 국가가 쪼개지자 유엔은 여러 차례 양 세력 중재를 추진했다. 하지만 정부 수립 계획은 번번이 무산됐다. 혼란이 장기화되다 보니 국민들 사이에선 “차라리 카다피 때가 나았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BBC는 “유엔의 중재 끝에 수개월 안에 민주 선거를 치르기로 하고 GNU가 주도한 과도정부가 2021년 수립됐지만, 세력 간 분쟁으로 아직도 선거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아랍의 봄’이 벌어진 국가 중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로 정착한 나라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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