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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베트남과 반도체·AI 협력 강화…‘대중 견제구’ 날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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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호 13면

전쟁 치른 과거 딛고 밀착하는 미·베트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과 함께 환영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과 함께 환영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0~11일(현지시간)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양국 관계의 격을 기존의 ‘전략적 동반자’에서 두 단계 뛰어넘어 가장 높은 단계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격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0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만나 이같이 합의했다.

미국은 이전까지 한국·중국·러시아·인도와, 베트남은 중국·러시아·한국과 각각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 관계에 대한 정의는 우호 관계가 강한 순서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전략적 동반자 관계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상호 신뢰하는 포괄적 동반자 관계 ▶포괄적 동반자 관계 순이다.

최고 수준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는 정치·안보·외교·경제·문화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넘어 중요한 (준)군사 동맹 관계에 있는 국가가 해당된다. 1975년 적화통일을 이룬 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도입한 이래 1991년 중국, 1992년 한국, 그리고 1995년 미국과 각각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1995년엔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2007년엔 세계무역기구(WTO)에도 가입했다. 이 같은 베트남의 적극적인 외교 행보에 미국도 지정학적 중요성 등을 감안해 ‘베트남 끌어안기’에 공을 들여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1일엔 보 반 트엉 국가주석과 팜 민 찐 총리도 만났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베트남은 공산당 서기장을 중심으로 국가주석(외교·국방)·총리(행정)·국회의장(입법)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어 이들과의 만남에도 관심이 집중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베트남 수뇌부와 ‘투자·혁신을 위한 정상회의’를 개최한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양국은 클라우드 컴퓨팅과 반도체·인공지능(AI)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심화할 것”이라며 “베트남은 주요 광물의 공급처”라고 강조하면서다. 이 발언은 미국이 AI 굴기를 노리는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공급을 막고 이에 맞서 중국은 미래 교통수단으로 꼽히는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에 필수적인 희토류 공급 중단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상황에서 나와 더욱 주목을 모았다.

반도체 분야 합의도 눈에 띈다. 미국과 베트남은 반도체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관련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최근 오픈AI의 챗GPT에 반도체를 공급하며 전 세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미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도 베트남과 AI 반도체 관련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반도체 패키징·테스트 업체인 앰코테크놀로지는 베트남에 16억 달러를 들여 공장을 짓고 다음달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번 방문에서 베트남을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반도체 공급처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풀이했다. 베트남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 ‘대중 견제구’를 날리는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지리적으로 중국의 남쪽에 위치한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해 대중 포위망을 더욱 죄겠다는 외교 전략 또한 엿보인다.

베트남도 일정 부분 화답했다. 당장 보잉사와 79억 달러(약 10조4900억원) 상당의 737 맥스 기종 여객기 50대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중국 항공사들은 2019년 3월 같은 기종 여객기의 추락 사고 뒤 운항을 중단한 것은 물론 주문 물량의 인수도 거부하고 있다. 이후 보잉사는 737 맥스 140대 이상이 재고로 쌓이며 심각한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이 여객기 50대를 주문하면서 보잉사의 든든한 구원투수로 떠오르게 됐다.

국제사회의 관심은 베트남이 미국과 외교 관계의 격을 높인 데 더해 과연 중국에 대한 포위망 구축에도 동참할 것인가에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는 지난 14일 “베트남은 바이든 방문 직후 고위급 인사를 중국에 보내 베이징의 외교적 보복과 압박을 최소화하는 작업에 나섰다”며 하노이 당국이 미·중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쉽게 기울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베트남은 그동안 잦은 고위급 상호 방문 등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베트남이 수출 중심의 경제성장에 필요한 원자재 공급국으로서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이끌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비록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등을 둘러싸고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긴 하지만 미국과의 밀착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분석이다.

베트남이 호주·싱가포르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맺는 방안을 적극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 등과의 관계를 감안할 때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최고 단계로 격상한 게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만큼 이를 일정 부분 희석시키려는 행보에 나설 수 있다는 진단이다.

이에 대해 미국외교협회(CFR)는 지난 11일 “베트남은 전 세계 모든 나라와 긴밀한 양자 관계를 맺고 다각 외교를 펼치는 게 국가 외교 전략”이라고 진단했다.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격상됐다고 해서 동맹 수준까지 나아가며 함께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베트남은 인근 아세안 회원국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데, 최근 필리핀과 싱가포르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반면 라오스·미얀마는 중국에 더욱 접근하고 있으며 아세안의 중심 국가인 태국은 미·중 사이에서 모호한 자세를 보이는 등 아세안 각국이 다양한 외교 전략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미 외교 전문지인 더디플로맷은 “지역 및 세계와 관계망을 강화하는 건 베트남 외교의 오랜 목표 중 하나”라는 내용의 응우옌 훈 손 베트남 외교아카데미 부원장 기고문을 실었다. 외교가에서는 내년 대선을 앞둔 바이든 대통령이 베트남을 적극 회유하고있지만 하노이 당국이 미국의 대중 포위망 구축에 선뜻 동참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베트남은 강대국에 정치·외교적 ‘부채’가 없기 때문에 굳이 한쪽 편을 들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베트남이 미·중 갈등 구조 속에서 ‘독자성’을 유지한 채 경제성장 등 실리를 중시하는 외교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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