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상준]사상을 초월하는 인간 존엄… 조선인 추도비의 외침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2023. 9. 15.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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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여러 언론 간토지진 참상·추모 보도하는데
도쿄지사는 추도 외면, 관방장관 “기록 없다”
진실 외면 말아야 불행한 역사 되풀이 안 해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간토대지진은 10만 명이 넘는 인명을 앗아갔다. 지진에 놀란 사람들이 도쿄의 한 공원으로 피신했는데, 인근 마을에서 발생한 화재가 격렬한 돌풍처럼 공원을 덮쳤다. 불길이 피난민들의 가재도구와 마차에 옮겨붙으며 가축과 사람까지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그 자리에서만 4만여 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그 비극의 장소가 ‘요코아미초 공원’이다. 매년 9월 1일이면 이 공원의 위령당에서 추도법회가 거행된다. 올해도 오전 10시에 법회가 열렸고,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보낸 추도문을 부지사가 대독했다.

공원 한편에는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비도 있다. 거짓 소문에 선동된 자경단과 관헌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조선인들을 기리는 추도비다. 재해 50주년이 되는 1973년, 각계각층 일본 시민들의 자발적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그 앞에서 매년 9월 1일이면 추도식이 열린다. 재해 100주년인 올해도 오전 11시에 일본 시민단체 주도로 추도식이 열렸다. 일본의 주요 언론 대부분은 이 추도식을 지면이나 방송에 실었다. 역대 도쿄지사는 2006년부터 매년 이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냈지만 2017년부터 그 전통이 끊겼다. 현 고이케 지사가 취임 이듬해부터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극우 인사로 유명하다.

오후 1시에는 같은 자리에서 총련이 주축이 된 추도식이 열렸다. 윤미향 의원이 참석했다 해서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그 추도식이다. 일본 언론 일부는 이 추도식을 오전 11시의 추도식과 묶어서 함께 보도했다.

오후 2시에 고이케 지사의 정례 기자회견이 있었다. ‘지사가 학살의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모든 분들께 애도를 표하고 있다”는 말로 답을 피했다.

오후 4시에 혐한 단체가 추도비 앞에서 집회를 준비하려 했으나 일본 시민들이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에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이미 답한 문제라 했다. 하루 전날 그의 대답은 “정부 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 문서를 비롯한 무수한 증거와 증인이 있는 참극이기에 그의 발언은 일본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NHK는 간토대지진 100주년 특집 프로그램에서 정부 문서에 있는 살상의 기록에 대해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역사적 사실의 말소는 용납할 수 없다는 사설을 실었다.

9월 2일에는 요코하마의 한 묘지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그곳에는 그 일대에서 학살당한 조선인을 위한 위령비가 있다. 일본 시민들이 2013년부터 매년 여는 이 추도식에 총련 계열 조선학교의 학생들이 와서 아리랑을 불렀다.

이틀간의 추모 집회를 보도하면서 일본 언론은 어느 매체도 총련의 집회를 다른 집회와 다르게 여기거나 분리해서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인 학살은 인간 존엄과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에 희생자를 기리는 추도식은 사상·신조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고 일본 언론도 그런 자세로 추도식을 보도한다. 일본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북한을 싫어한다. 일본인 납치 문제나 핵무기 문제를 겪으면서 북한에 우호적이던 매체나 단체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모임에서는 굳이 총련을 배격하지 않는다.

그러니 윤미향 의원이 참석한 추도식이 총련이 주축이 되어 열렸다 해서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고이케 지사나 마쓰노 장관 같은 사람이다. 이 사안에 한해서는 윤미향 의원을 질타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를 향해 인권의 가치 위에서 과거를 직시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반일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진심의 충고다.

요코아미초 공원의 조선인 추도비 옆에는 건립 당시의 마음을 새긴 또 다른 비가 서 있다. “… 이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민족 차별을 없애고, 인권을 존중하며, 선린우호와 평화의 큰길을 개척하는 초석이 되리라 믿습니다. 사상신조의 차이를 넘어 이 비석의 건립에 힘쓴 일본인의 성의와 헌신이, 일본과 조선 두 민족 간 영원한 친선의 힘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남북한을 조선으로 부르던 시절에 쓴 이 비문은 평화를 세우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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